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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거문고 Sep 05. 2021

어른을 위한 동화(14)

리아 이야기

리아는 플레아의 조언대로 누구나 궁금해할 만한 왕실의 귀족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얼굴을 그려서 파는 것에 처음에는 죄책감을 느꼈다. 아직도 그 죄책감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리아가 살던 곳과 저잣거리는 달랐다. 이곳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이미 뿌리내린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이 옳을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아름다운 그림이군요.”   

  

나지막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리아는 고개를 들어 여자와 눈을 마주했다. 짙고 깊은 눈빛이었다. 여자는 푸른 망토를 두른 채 웃고 있었다. 여자의 허리춤에는 기다란 칼자루가 있었고, 이질적인 그녀의 모습은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이곳 사람이 아닌 것 같군요.”     


“한때는 이곳 사람이었지요.”     


“푸른 망토와 칼자루를 보니 꽤나 귀한 것이군요. 기사이신가요?”     


“맞아요. 서쪽 바다 건너 사막의 나라에서 온 기사입니다.” 

    

“그곳에선 여자도 기사가 될 수 있다더니 진짜였군요.”     


“살기 힘든 곳에선 각자가 자신의 목숨 정도는 지켜야 하는 게 당연하니까요. 기사가 여자를 보호해 주길 기다릴 순 없거든요.”     


“내가 아는 소녀가 있어요. 그 아이의 꿈도 기사이지요. 이 이야길 해주면 아주 좋아할 거예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요. 날 환영해주는 이가 있다니.”     


“당신의 가족들은요? 당신을 잊었나요?”     


“난 돌아갈 수 없어요. 스스로 떠난 거거든요.”     


“당신을 기다릴 수도 있잖아요.” 

    

“아뇨. 기다리는 게 아니라 그들은 다시 확인하고 싶은 거예요. 자기 말이 맞았다는 걸. 스스로 찾아가지 않는 편이 좋지요.”     


“그럼... 지금 혼자 떠돌아다니는 건가요?”     


“원래 혼자는 아니었지요. 남편이 있었지만 죽었어요.”     


여자의 표정은 여전히 평온했다.      


“나와 같은 처지군요.”     


“그래서 그림을 팔고 있군요. 당신도 이곳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말이에요.”    

 

“맞아요.”     


“당신이 직접 그렸나요?”     


“네. 본래 그리려던 것은 이런 것이 아니었지만...”     


귀족들의 얼굴을 그려 판다는 것에 수치심이 든 리아가 고개를 숙였다.     


“저 그림이 특히 아름답군요.”    

 

여자는 한쪽 구석에 세워둔 그림을 가리켰다. 그것은 요나스가 죽던 날의 하늘을 생각하며 그린 그림이었다.     

“그저 하늘인걸요.”     


“저 날의 하늘이 당신에게 특별했나 보군요.”  

   

“그렇게... 느껴지나요?”    

 

“이런, 당신은 자기 실력에 대해 하나도 믿지 못하고 있군요.”     


“내가 만일 실력자였다면, 여기 이 그림들은 이미 다 팔렸을 거예요. 생각보다 내 실력이 돈을 주고 살 만큼은 아닌 거겠지요.”     


“이곳은 이런 그림이 환영받을만한 장소가 아니니까요. 대신 왕실의 사람들을 그리는 건 당신도 그걸 알기 때문이 아닌가요?”     


“하지만 평생 남의 얼굴을 그리면서 살고 싶지는 않은걸요. 아니 사실... 이제 그림을 그리면서 먹고살고 싶은 건지도 잘 모르겠어요. 이것밖에 할 줄 아는 게 없으니 하는 것 같기도 해요.”     


“당신의 그림은 지금부터가 멋질 텐데요.”     


“무슨 말이죠?”     


“삶에서 하고 싶은 말이 생겨야 사람들은 무언가를 만들지요. 악기를 연주하기도 하고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글을 쓰기도 하고요. 당신의 그림은 지금부터 깊어질 거예요. 아픔을 겪은 사람이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건 얼마나 큰 축복인가요.”     


“그림을 못 그리더라도 아픔을 겪지 않아도 되는 때가 더 좋았는걸요.”     


“세상 밖은 생각보다 험난하죠? 그렇지만 조금만 더 걸어 나가면 알게 돼요. 이 모든 것들은 결국 필연이었다는 것을. 그저 내 세상이 너무 좁았을 뿐이었다는 것을.”     


“누군가는 겪지 않아도 될 일인걸요.”     


“그 누군가는 알지 못할 거예요. 남편을 잃은 날의 하늘을 기억하는 것이 어떤 마음인지를.”     


“그걸 왜 알아야 하죠? 몰랐던 때가 더 행복했는데.”     


“그 행복했던 순간들이 진짜 행복으로 기억될 수 있어야 해요. 그럼 지금의 당신이 얼마나 멋진지 알게 될 거예요.”     


“그 기억들은 행복일 수 없어요. 어떻게 그 순간들을 슬픔 없이 떠올릴 수 있겠어요. 이제 예전의 나는 슬픔이 되어버렸고 지금의 나는 그저 버티고 있는데 이 삶이 어떻게 멋지단 말이죠?”     


“당신을 사랑해 준 사람들을 슬픔으로 기억하지 않게 되면 그땐 아름다운 추억이 된답니다.”     


“돌아가 다시 만날 수 있다면 그럴 수 있어요. 하지만 모두가 날 버리고 떠나고 죽어버렸는걸요.”    

 

“당신을 사랑해 준 단 한 사람을 기억해요. 그 사람을 아프게 기억하지 말아요. 분명 당신은 받은 사랑이 많은 사람이니까.”     


여자가 하늘의 그림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나 때문에 죽은 남편을 무슨 수로 아프지 않게 기억하나요. 그건.... 불가능해요.”     


리아가 눈물을 흘렸다. 플레아가 이곳에서 우는 것은 절대 금물이라 했으나 참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당신이 남편을 죽인 것은 아닌걸요.”    

 

“그냥 말장난이에요. 내가 죽인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요!”     


“난 후작의 딸로 태어났고 많은 것을 누렸어요. 그런데 세상 밖에 대한 호기심을, 수많은 삶을 경험해 보고 싶은 마음을 누를 수가 없었지요. 나를 지켜주던 기사가 휘두르는 검을 보면서 나도 저 아름다운 것을 갖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도망쳤지요. 그 남자와 함께. 보시다시피 나는 기사가 되었고 남편은 죽었어요. 그리고 내가 떠난 슬픔으로 나의 어머니도 죽었어요.”    

 

리아는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여자의 얼굴을 보았다. 강인하고도 차분한 표정이었다.   

  

“어떻게 울지 않을 수 있죠?”     


“나는 남편과 행복했거든요. 아마 나의 쌍둥이 언니는 다르게 생각하겠지만, 내 마음이 검어지고 나서야 좀 더 멋진 삶을 살게 되었어요. 그 사람이 없어졌다고 해서 그 선택이 옳지 않았던 건 아니니까.”  

   

“나는 당신처럼 강하지 못할 거예요. 그 삶에서 도망칠 필요도, 그런 생각도 하지 않았으니까요.”     


“당신은 죽지 않고 살기를 선택했지요. 스스로의 힘으로. 그걸로 충분해요. 만일 필요하다면, 당신에게 간단한 검술을 알려드리죠, 요나스 공작부인. 당신 몸은 스스로 지켜야 하니.”  

   

요나스 공작부인이라는 말에 리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나를 아나요?”     


“당신을 잊을 수는 없지요. 무도회에서 당신처럼 빛나는 사람은 없었는걸요.”     


“미안해요. 난 당신을 기억하지 못하겠어요. 누구죠?”    

 

“율리아. 마드리안 후작의 딸이지요.”  

   

리아가 생각난 듯 눈을 크게 떴다.     


“마드리안 후작의 딸은... 신을 받드는 사람이 되었다고 들었는데요.”     


“언니를 공 작가와 혼인시키기 위해서 그 정도 거짓말쯤은 했어야 했겠죠.”     


“언니라면...”     


“레이나. 지금 공작부인이겠군요. 아무튼 난 내일 다시 오도록 하죠. 오늘은 갈 곳이 있으니.”    

 

율리아는 망토를 휘날리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갔다. 리아는 눈물을 닦고 다시 그림을 팔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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