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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거문고 Sep 07. 2021

어른을 위한 동화(15)

율리아 이야기

율리아는 여행자를 위한 여관방에 짐을 풀었다. 

짐이라야 옷가지와 장검, 약간의 여비가 전부였지만, 율리아는 그 물건들을 소중히 닦아 제자리에 놓았다. 

자매를 지키는 기사였던 엘시오와 도망치던 날, 율리아는 쌍둥이 언니인 레이나가 가장 눈에 밟혔다. 


사람들을 믿지 않는 레이나가 믿는 유일한 존재가 율리아 자신이라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아늑한 후작의 성에서 좁은 세상만 보고 살 수는 없었다. 율리아는 세상이 궁금했다.   

  

“나와 도망친 걸 후회하지 않나요?”    

 

엘시오는 허리에 찬 검의 날만큼이나 섬세한 남자였고 때문에 율리아는 가족을 떠난 죄책감을 위로받을 수 있었다.      


“한순간도 후회하지 않아요. 당신은요? 기사의 작위를 버리고 사막의 나라로 도망친 걸 후회하지 않나요?”     

“만일 당신이 힘들어했다면 후회했을 거예요.”     


“덩치만 컸지 나보다 겁이 많군요.”     


“맞아요. 지키고 싶은 것이 생기면 겁도 많아지게 마련이죠.”     


“엘시오, 나도 검술을 배우고 싶어요. 당신에게 짐이 되긴 싫거든요.”     


“사막의 나라에선 여자도 검술을 배울 수 있어요. 그렇지만 당신이 검을 손에 들게 되면 거친 것들이 다가올 거예요. 준비된 사람에겐 그만큼의 시험이 따르니까요.”     


“준비된 자에게 오는 시험이라면, 당연히 제게도 와야 공평한 것이겠죠.”     


“생각만큼 쉽지는 않을 거예요. 누군가의 몸에 상처를 내야 할 수도 있어요.”     


엘시오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율리아를 바라봤다.     

 

“엘시오, 나는 당신과 세상을 누리고 싶어 성에서 도망친 거예요. 당신에게서 보호받기 위해서가 아니랍니다. 그러니 나에 대한 책임은 생각하지 않아도 돼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어요. 나 때문에 가족을 떠나온 여자에게요.” 

    

“무거운 마음은 둘 사이를 멀어지게 만든답니다, 엘시오. 나는 당신과 오랫동안 행복하고 싶어요. 그러니 나도 검술을 배우겠어요. 내 몸 정도는 지킬 수 있어야 당신과 여러 곳을 다닐 수 있으니까요.”   

  

율리아는 사막의 나라에서 검술을 배웠다. 둘은 척박한 마을의 가장 험난한 위치에 보금자리를 틀었고 그곳이 그들에게는 가장 안락한 요새가 되어주었다.     


엘시오가 죽은 것은 3년 후였다. 율리아가 검술을 익혀 스스로를 능숙하게 지키게 되었을 무렵, 일정한 터전 없이 약탈로 생계를 이어가는 기마부대가 그들이 사는 사막의 마을에도 들이닥쳤다. 


엘시오는 싸우는 와중 사막의 모래에 묻혀 영영 돌아오지 못하게 되었다. 슬퍼할 겨를이 없었다. 

말을 타고 사막을 떠돌며 도적질을 일삼는 기마병들이 율리아가 사는 집까지 오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율리아는 그의 검과 망토를 챙긴 후 집을 불태웠다. 


누구도 그들의 추억을 훼손하지 못하도록. 그리고 스스로가 그곳에 머물지 못하도록.   

  

“율리아, 만일 내가 먼저 죽는다면, 당신은 다시 왕국으로 돌아가요.”   

  

“싫어요. 그곳은 이미 내가 스스로 떠나 온 곳인걸요. 나는 내가 없다면 당신이 할 일을 똑같이 하겠어요.” 

    

“당신이 먼저 죽는다면 나는 당신을 따라 목숨을 끊을 거예요. 하지만 나는 당신이 죽는 걸 바라지 않아요.”     

“아뇨. 그러지 말아요. 나도 당신이 슬픔으로 이 세상을 떠나는 걸 바라지 않아요. 내가 죽었다고 해서 어째서 우리가 함께한 시간이 슬픔으로 끝나야 하나요?”    

 

“죽음은 어찌할 수 없는, 우연도 바랄 수 없는 끝이니까요.”  

   

“당신이 먼저 죽는다면, 나는 당신의 검과 망토를 가지고 온 세상을 떠돌겠어요. 우연도 바랄 수 없는 이별이 결국 아름답게 완성되려면 그런 시간들이 필요할 테니.”   

  

엘시오는 율리아의 말에 미소 지었다. 그때는 그 시간이 그렇게 빨리 올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율리아는 엘시오의 흔적을 좀 더 느끼고 싶었다. 둘이 함께 만든 집에 더 오래 머물고 싶었다. 

그렇지만 엘시오의 말대로 죽음은 우연도 바랄 수 없는 이별이었고 남겨진 사람은 그 이별을 최대한 아름답게 완성시켜야 했다.     


 첫 번째 여행지로 왕국을 정한 것은 엘시오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기 위함이기도 했다. 만일 저잣거리에서 그림을 팔고 있는 리아를 보지 못했다면 바로 배를 타고 다른 나라로 갔을 터였다. 


리아에게 검술을 가르쳐 주는 동안 머물게 되었으니 어쩌면 레이나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머릿속에 자기 대신 공작부인이 된 레이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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