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거문고 Sep 11. 2021

어른을 위한 동화(17)

리아 이야기

율리아에게 검술을 배우면서 리아는 스스로의 나약함을 더욱 뼈저리게 느꼈다. 검게 탄 율리아의 피부를 볼 때마다 리아는 여전히 새하얀 자신의 피부가 부끄러웠다. 검술을 배우면서도 율리아의 강한 눈빛, 탄탄한 피부를 생각하다 보니 자세는 흐트러졌고 급기야 검을 놓치고 말았다.   

 

“집중하지 못하는군요.”  

  

“미안해요.”    


“내게 미안할 필요 없어요. 검술이 필요치 않다면 그만해도 돼요.”   

 

“그런 게 아니에요. 내게도 검술은 필요해요.”

   

“그럼 무슨 일이 있기에 이토록 집중하지 못하는 거죠?”   

 

“율리아, 당신은 정말 대단해요.”    


“뭐가요?”    


“난 왜 이렇게 약한 걸까요. 사실 난 내가 나약한 게 아니라 너무 큰 슬픔이 닥쳐서 그 슬픔이 날 일어서지 못하게 하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아닌 것 같아요. 당신은... 이렇게 강하게 살아가잖아요. 당신을 볼 때마다 내가 아주 나약하다는 걸 알게 돼요.”    


“리아, 당신은 충분히 강해요. 다만 당신이 그 사실을 모를 뿐이에요.”    


“내가 강하다면 이렇게 힘들 리는 없겠지요. 난 당신처럼 여유롭지 못하잖아요.”    


“당신은 살아남기 위해 그림을 그리고 그 그림들을 팔고 있잖아요. 그 의지만으로 강함은 충분히 증명한 것 같은데요.”    


“위로하지 않아도 돼요.”    


“많이 지쳤군요. 그렇지만 날 믿어요, 리아. 예전 무도회에서 누구보다 빛났던 때보다 지금의 당신이 훨씬 아름다워요.”  

  

“내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이죠? 누구도 날 봐주지 않는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요?”  

  

“때로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를 알려주고 싶은 사람이 있지요. 당신이 그런 사람이에요. 당신은 알지 못하겠지만.”   

 

“당신에게만 그렇게 느껴지는 거예요. 내 삶의 빛은 이미 사라졌어요.”    


“지금 함께 없다고 해서 당신에게 베푼 누군가의 사랑을 소용없는 것이라 여기지는 말아요. 당신 남편은 당신을 위해 마지막까지 결백을 주장하지 않았어요. 지금 당신이 이곳에 자리 잡게 해 준 누군가의 도움도 있었을 거예요. 그들의 마음을 작게 만들지 말아요.”   

 

“알아요. 하지만 난 아직 내 아픔에서 벗어나지 못했어요. 내겐 시간이 더 필요해요.”    


“아프지 않으면 죄를 짓는 기분일 테니 그렇겠지요. 그런 마음을 오래 품고 있으면 스스로를 아프게 만든답니다.”    


“이미 사라진 것들을 어떻게 아쉬워하지 않을 수 있죠? 다시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을 도대체 어떻게 해야 아프지 않게 기억하죠? 율리아, 나 때문에 남편이 죽은 건 사실인걸요. 어떤 말장난으로도 그게 없던 일이 될 수 없어요. 내가 아파하지 않을 수 있다고요? 도대체 언제죠 그건? 이 시간들이 끝날까요? 끝나지 않을 것 같아요.”  

  

“당신이 진짜 원한다면요.”    


“당신은 어떻게 괜찮아졌죠? 어떻게 당신이 떠난 슬픔에 죽어버린 어머니를 잊을 수 있죠?”    


“전혀 잊지 않았어요. 아직은 이해되지 않겠지만 당신도 곧 알게 될 거예요. 모든 건 그 사람의 선택이었다는 걸요.”    


“잔인하군요.”    


“당신이 공작부인으로 남을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그건 이미 불가능해요. 요나스가 죽을 거라는 걸 몰랐을까요? 몰라서 당신을 지키려 했나요? 알고 선택한 거예요.”   

 

“당신 일이 아니니 그렇게 얘기하는 거예요. 만일 다시 돌아간다면 난 국왕 앞에 무릎 꿇고 모든 일은 내 탓이라고 대신 날 죽이라고 했을 거예요.”    


율리아가 가만히 리아를 바라봤다. 올리브 빛으로 건강하게 빛나던 리아의 눈동자는 빛을 잃어 가고 있었다.

리아의 마음은 검은빛으로 가득했다.     


“하고 싶은 말을 당신의 목소리로 말하기 위해 지금 이 순간은 꼭 필요해요.”    


“아뇨. 나는 이미 예전의 행복은 가질 수 없게 되었어요. 너무 간절히 원하는 것이 내 손을 벗어나 버렸고 난 그저 휩쓸리듯, 운명에 날 내맡길 수밖에 없어요. 내가 그토록 바보 같다 여기던 삶이 내 삶이 되어버렸군요.”   

 

“남편이 죽었다고 해서, 모두가 당신 곁에 남지 않았다고 해서 그들과 함께했던 모든 순간이 쓸모없어졌다 여기지는 말아요. 그건 정말 무례한 태도니까. 당신도 그들도 서로 행복했어요. 그 순간을 떠올리는 건 아름다워야 해요, 리아.”    


“못할 것 같아요. 할 수 있을 줄 알았지만 난 그저 남들과 같은 평범한 사람일 뿐이었어요. 난 당신처럼 특별하거나 강하지 않아요.”    


“난 남편이 죽은 후 매일 밤 검술을 했어요. 별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었으니까요. 어느 순간 나는 혼자 내 몸을 지킬 정도로 강해져 있더군요. 나라고 슬프지 않은 게 아니에요. 그저 매일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뿐이에요.”    

“난 매일 밤 그림을 그려요. 요나스와 마리아나, 이네트의 얼굴을 그리죠. 때로 이네트의 집에서 내가 가르치던 두 소녀를 떠올리기도 해요. 그리고 매일 밤 울어요. 매일 밤 무너지고 다음날 다시 장에 나와 귀족들의 얼굴을 팔아요. 매일 무언가를 하지만 난 텅 비었어요. 내 삶은 나를 벗어나 제멋대로 흘러가요.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하죠? 뭘 더 어떻게 해야 슬프지 않을 수 있죠? 과거의 것을 그리는 것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인데 도대체 뭘 더 어떻게 해야 하나요?”    


리아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끅끅대며 울음을 참다 율리아가 안아주는 순간 목놓아 소리 내어 울었다. 율리아가 리아의 등을 다독였다.    


“슬픔은 당신의 것이에요. 당신을 사라지게 할 수 없는 당신의 일부랍니다. 그게 당신을 만들고 마음을 넓히고 세상을 보는 눈을 키워줄 거예요. 그러니 두려워 말아요. 나약함을 아는 사람은 무너지지 않아요.”    


“율리아, 슬픔에도 끝이 있나요?”    


“슬픔엔 시작도 끝도 없답니다. 대신 크기가 있지요. 크고 작은 모든 슬픔이 당신의 일부예요, 리아. 그 속에 요나스 공작도 당신을 떠난 사람들도 녹아있지요. 그 기억이 당신을 압도하지 않으면, 그때부터 삶은 다시 당신의 것이 된답니다.”    


“내게 그걸 가르쳐 줘요. 어떻게 기억이 날 압도하지 않게 하는 건지 알려줘요.”    


“그건 스스로 알아야만 해요. 무너지고 휘둘리고 중심을 잃으면서요. 난 해줄 수 있는 게 없지만 대신 당신의 옆에 있어 줄게요.”    


“당신이 떠나지 않을 거라는 걸 어떻게 믿죠?”    


“난 기사예요, 리아. 거짓 맹세는 하지 않아요.”

이전 16화 어른을 위한 동화(16)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