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거문고 Sep 13. 2021

어른을 위한 동화(18)

아그네스 이야기

아그네스는 지팡이를 짚고 숨을 고른 후 의자에서 일어났다. 

곁에 시중을 드는 하녀가 있었지만 한 번도 하녀의 도움을 받아 일어난 적이 없었다. 

꼿꼿하고 꼬장꼬장한 마른 고목 같은 늙은이. 아그네스는 자신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평판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재력으로는 왕족 다음이라 일컬어지는 드세니스카 공작부인으로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평판이기도 했다. 


재력과 권력에 빌붙으려는 자들을 면밀히 살피고 평판을 유지하려면 사람을 가까이하기보다는 멀리하는 것이 유리했으니까.      


아그네스는 레이나가 기다리는 응접실로 들어섰다. 레이나가 그녀를 맞았다. 아그네스는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아그네스, 괜찮으신가요? 무릎이 좋지 않다 하여 걱정했어요.” 

    

“나이가 들었으니 이 정도 불편함은 감수해야겠지요.”  

   

“여전히 정정하신걸요.”     


아그네스는 레이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속을 알 수 없는 여자였고, 가문보다도 자기가 우선인 사람이었다. 아그네스는 신념 없는 철저함은 멀리했다. 레이나는 아그네스가 멀리 하는 부류의 사람이었다. 그리고 걱정이 되어 찾아왔다는 레이나의 말 역시 믿지 않았다.     


“오늘 따로 나를 보자고 한 이유가 있겠지요? 그저 걱정이 되어서는 아닌 것 같은데요.”  

   

레이나는 머뭇거리는 기색 없이 한 장의 그림을 꺼냈다. 

    

“제 시녀가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다 발견했지 뭐예요.”    

 

아그네스는 레이나의 손에 들린 그림을 받아 들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그것은 아그네스의 초상화였다. 

미간에 깊게 잡힌 주름과 바짝 틀어 올린 흰 머리칼, 웃음기를 찾아볼 수 없는 입매. 실제의 얼굴과 묘하게 달랐지만 아그네스는 꽤나 특징을 잘 잡아낸 그림이라고 생각했다.    

 

“누가 내 얼굴을 그려 판다는 말인가요?”     


“부인의 얼굴뿐이 아니랍니다. 왕족들과 지위 높은 귀족들의 얼굴, 사교계의 풍경을 그려 팔고 있어요. 그저 상상으로 그려낸 그림이라면 이렇게 찾아오진 않았을 거예요. 누군가 알고 그린 것 같이 사실적인 게 문제이지요.”     


“저잣거리 화공 중에 귀족들의 얼굴을 알 만한 사람이 있다는 말인가요?”     


“그게... 부인께서도 아시는 분입니다.”     


아그네스는 굳은 표정으로 레이나를 응시했다. 레이나는 연극에 능한 사람이었고 아그네스는 그림보다도 레이나를 경계했다.     


“요나스 공작부인입니다.”     


“요나스 공작부인이 저잣거리에서 그림을 그려 팔고 있다는 말인가요?”    

 

레이나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불온한 그림을 그려 신의를 잃었는데 다시 이런 천박한 짓을 하다니. 성 밖으로 내쫓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녀는 왕으로부터 용서받은 이 나라의 국민이지요. 우리가 그녀를 내쫓을 권리는 없어요.”     


“하지만 같은 잘못을 반복하는 것은 용서를 배반한 것이 아닌가요?”     


“부인,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은 보고 듣는 것도 많아지지요. 보고 듣는 모든 것에 대응을 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하지만 이건 요나스 공작이 저질렀던 것처럼 역모의 작은 씨앗일지도 모릅니다.”    

 

“이 그림 어디에서 그런 것이 느껴지나요. 내가 보기에 이 그림은 지극히 나를 닮은 초상일 뿐입니다.”   

  

레이나가 입을 다물었다.     


“몇 년 전, 사교계에서 리아는 젊고 아름다운 공작부인이었지요. 그녀는 날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요. 물론 대부분의 젊은 귀족부인들이 그렇겠지만요. 하지만 난 그녀를 싫어하지 않았어요. 솔직히 말하자면 염려했지요. 사람들은 그녀를 순수한 아름다움의 결정체라 했고 나는 그것을 미숙하다 보았지요. 이 그림을 보니 마음이 놓이는군요. 그녀는 더 이상 미숙하지 않아요.”     


“역모죄로 죽은 요나스 공작을 옹호하시는 건가요?”     


“오, 아니오 부인. 그저 버려진 공작부인을 동정하는 것이지요.”   

  

“전 더 이상 귀족이 아닌 여자가 사교계 사람들의 얼굴을 그려 파는 것이 싫어요.”    

 

“사교계의 풍문이 귀족들을 더 특별하게 만들어 준다는 것을 모르지 않을 텐데요.”    

 

“그렇지만 요나스 공작부인은 감히 이런 행동을 해서는 안 돼요.”    

 

“왜죠?”    

 

“잘못을 했으니까요. 정말 잘못했다고 생각한다면 또다시 붓을 잡아서는 안 되는 거예요. 그녀는 지금 자기 잘못을 기억하지 못하는 거라고요.”   

  

“멋모르고 행한 모든 행동이 잘못이라면 우리도 지금쯤 저잣거리에서 구걸이나 하고 있을지도 모르지요.”  

   

“그녀가 저지른 잘못은 달라요. 그건 반역이었다고요!”   

  

“그녀의 남편이 지은 죄랍니다. 그녀는 용서받았어요. 국왕으로부터요.”     


“같이 죽었어야 했는데 요나스 공작이 덮어쓴 것이지요.”     


“우리가 아는 것을 국왕께서도 당연히 아신답니다. 국왕은 요나스를 아꼈어요. 그래서 마지막 부탁을 들어준 것이지요.”     


“그녀는 얼굴을 내놓고 살아갈 자격이 없어요.”     


“요나스 공작부인이 한 일은 역모가 아니니 살아남은 거랍니다. 공작부인들이 그녀와 교류하지 않는 것은 가문을 위한 일이니 당연한 처사이지만 과거의 사건을 가져와 잣대를 들이미는 것은 해서는 안 되는 일이지요. 선을 넘은 일입니다.”     


“하지만,”     


레이나는 말을 하려다 아그네스의 굳은 표정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그 잘못에 대한 벌을 내리는 일을 이미 국왕께서 하셨지요. 우리는 그 일에 더 이상 관련할 이유가 없답니다.”     


“저는 그저 죄를 지었던 죄인이 다시 왕국에 폐를 끼칠까 염려되어 말씀드리는 것뿐입니다. 그 일을 다시 논하자는 게 아니었어요.”     


“오, 정말 그걸 염려했다면 당신은 이 그림을 남편에게 주었겠지요. 남편의 충의를 증명할 좋은 기회일 테니. 내게 들고 온 이유가 무엇인가요. 누군가 대신해서 과거를 들쑤시고 살아남은 그녀를 망가뜨리길 원하는 게 아닌가요?”     


“오해 마세요. 저는 요나스 공작부인에 대해 잘 알지 못해요. 그런 증오를 가질 이유가 없어요.”     


“당신은 이곳에서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하지요. 오래도록 머물고 싶어 하고요.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충고를 하나 해 줄게요.”     


둘 사이 잠시 정적이 감돌았다. 레이나는 이제 자신의 성으로 가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왕국과 가문에 대한 충성심 빼고는 볼 것 없다 생각했던 아그네스가 처음으로 만만찮게 느껴졌다.     


“절대 절실함을 드러내지 말아요.”    

 

“전 절실하지 않아요.”     


“자신에 대해 잘 모르는군요.”     


“전 이미 가진 게 많은데 무엇에 절실하겠어요?”     


“태생부터 특별하지 않은 것에 대해, 평생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해 갈망하겠지요.”     


아그네스의 표정은 평온했다. 레이나는 그녀의 뺨을 한 대 치고 싶었지만 참아야 했다.   

  

“이만 가보겠어요. 부디 저에 대한 오해는 하지 말아 주세요. 전 그저 죄인의 행동이 염려스러웠을 뿐이니까요.”     


“조심히 가세요, 부인. 그림은 두고 가시지요. 내가 처리하도록 할 테니.”     


레이나가 돌아간 후, 아그네스는 오래도록 그림을 바라봤다. 


그림 속 아그네스의 눈빛은 근엄하고 지혜로웠다. 누군가 자신의 모습을 이렇게 그려준다는 것이 나쁘지 않았다. 어쩌면 리아에 대해 지나치게 엄격하게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누군가 가르치고 교화해야 할 대상이 아니었는데. 


아그네스는 지팡이를 짚고 힘 겸 게 일어섰다. 저잣거리로 찾아가 리아를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전 17화 어른을 위한 동화(17)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