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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거문고 Sep 18. 2021

어른을 위한 동화(19)

리아 이야기


리아는 그림을 팔다 자기 앞에 멈추어 선 드레스 자락에 고개를 들었다. 

한눈에 그 중년의 여성을 알아보았다. 

    

“드세니스카 부인...”

     

“오랜만이군요.” 

    

“여긴... 어떻게...”     


공작부인은 리아에게 자신의 초상을 건네었다.     


“당신에게 그림을 사 간 이들 중 어떤 공작부인의 하녀가 있었답니다. 그 공작부인이 내게 전해 준 것이지요.”     

리아는 부끄러워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요...”    

 

“오, 난 사과를 받으러 온 게 아니니 고개를 들어요.”  

   

“그럼... 여긴 왜...”    

 

“당신을 보러 온 것이지요.”  

   

“당신의 말이 맞았어요, 부인. 난 당신이 내게 하는 말들이 다 틀렸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죠... 어때요? 당신이 맞아 기분이 좋나요?”     


“난 내가 맞다는 것을 확인하러 온 게 아니니 그렇게 오해하지 말아요.”   

  

“그것도 아니라면 당신이 날 찾아올 이유가 없는걸요.”   

  

“때로 이제야 보이는 것들이 있지요. 시간이 지나야 만 알 수 있는 것들. 나는 내가 한 말보다 그때의 마음을 기억해요. 난 당신을 염려했어요. 그만큼 당신은 아름다운 사람이었으니.”     


“날 아름다운 사람이라 생각했다고요? 그건 몰랐어요. 늘 나를 탓하기만 했으니까요.”     


“난 군더더기 없이 할 말만 해야 하는 삶에 익숙하답니다. 사람을 판단하고 멀리하지 않으면 가문의 재산은 남아나지 않았을 거예요.”   

  

“하지만 당신이 한 말은 틀리지 않았는걸요. 난 지나치게 자유로웠고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렸어요.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멀어지게 만들었구요. 이제와 생각해 보니 당신 말이 맞았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당신을 그렸어요. 수많은 삶을 지켜본 당신의 눈이 지혜롭다는 것을 인정하는 그림을요.”     


“난 예언가가 아니랍니다. 당신에게 했던 말들은 오히려 그대로 되지 않기를 바라는 염려라는 것을 알아야 해요. 내 말대로 되었다고 내가 지혜로운 것이 아니지요.”     


“하지만 당신과 같은 지혜가 있었다면 난 내 삶을 그렇게 굴러가게 두지 않았을 거예요.”     


“당신이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요, 리아. 정말 당신이 문제였다면 주변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당신에게 모여들지는 않았겠지요.”     


“당신이라면요? 당신은 왕국 최고 가문의 공작부인이지만 한 번도 구설에 오르내린 적이 없잖아요. 모두의 입방아의 오르내리는 것을 무시한 내 탓이에요. 그런 것들은 내게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할 줄 알았어요.”

     

“리아. 당신은 다른 사람이 될 수 없어요. 누구도 다른 사람이 될 수 없답니다. 당신은 지금 이 비극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고 있을 뿐이에요. 그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아요.” 

    

“다른 사람인 척이라도 할 걸 그랬어요.”     


“그랬다면 당신은 지금과 같은 사람은 될 수 없었겠지요.”     


“지금과 같은 사람이요?”     


“수많은 사람을 봐 온 내 눈엔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보인답니다. 예전의 당신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깊이 있고 불꽃을 가진 사람이 되었군요.”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요? 예전의 삶이 더 좋았는걸요.”   

  

“수많은 사람들을 잃어 외롭군요.”    

 

“많이요. 그 사람들로만 채울 수 있는 외로움이에요. 평생 이겨내지 못할 거예요.”    

 

“오, 리아. 당신이 모든 것을 잃었을 때 당신 옆에 다가와 준 사람들이 있었을 텐데요.”   

  

리아의 머릿속에 이네트와 플레아, 그리고 율리아가 떠올랐다.     


“그 사람들이 과거의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부족한가요? 과거의 아픔으로 지금을 살아가지 말아요, 리아. 당신 옆에 다가온 사람들을 귀하게 여겨요.”     


“나는... 누군가를 위해 살아가는 삶은 익숙하지 않아요. 당신 말이 맞아요, 부인. 나는 지금도 그들의 마음은 크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다들 나보다는 나은 삶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들을 위해 살아갈 필요는 없어요. 그렇지만 그들의 삶을 진심으로 이해한다면, 위할 수밖에 없겠지요.”     

“어떻게 아는 거죠? 당신은 옆에 사람을 잘 두지도 않았잖아요. 어떻게 이 모든 걸 아는 거죠?”  

   

리아의 질문에 드세니스카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옆에 사람을 잘 두지 않게 된 이유가 있겠지요. 난 당신만큼 사람을 잘 믿지 못해요. 다가오는 모두를 같은 잣대로 판단했고 나를 지키기 급급했죠. 내게 온 사람들은 나의 지위와 나를 분리하지 못했어요. 하지만 리아, 당신은 나처럼 살 필요가 없어요. 모든 사람을 이해하고 어울릴 수 있으니까요.”   

  

리아의 그림을 훑어보며 드세니스카 공작부인이 말했다.    

 

“이곳에 머물기엔 아까운 실력이군요.”     


“하지만 저잣거리에서 오랫동안 꽃을 팔아 온 플레아가 말해줬어요. 여기서 적응하지 못하면 어딜 가서든 쉽게 떠나버릴 거라고.”     


드세니스카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멋진 사람이겠군요.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온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지요.”   

  

“맞아요. 아주 멋진 사람이에요, 플레아는.”   

  

“마음이 놓이는군요.”    

 

“날... 염려했나요?”    

 

“그때도, 지금도. 늘 염려하고 있답니다, 리아. 당신이 과거에 받은 사랑을 기억해낸다면 앞으로 다시는 과거를 슬픔으로 기억하지 않을 거예요.”   

  

“사랑해준 사람들이 모두 떠났는데도요?”   

  

“그들이 날 배신하고 떠났다 해도 그때 받은 마음은 진실이지요. 그것만 기억해요. 주고받은 진심.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다 해도 그때 내가 받은 진심. 그것으로 과거의 당신을 더 이상 불쌍한 사람으로 여길 필요는 없어질 테니.”     


“고마워요, 드세니스카 부인. 그때도 지금도 날 염려해줘서 고마워요.”  

   

“나도 고마워요. 누군가 나를 이렇게 지혜로운 사람으로 기억해준다니. 그림이 아주 마음에 들었답니다.”  

   

“당신과 이렇게 많은 대화를 해 본 것은 처음인 것 같아요.”   

  

“그땐 내가 진심을 전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으니까요. 어리석었지요. 나를 낮추는 일이라 생각했으니.”     


“아마 전했어도 내가 받아들이지 못했을 거예요.”     


“잘 지내요, 리아.”    

 

“다시 한번 와 주실 건가요?”     


“원한다면요.”     


“언제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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