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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거문고 Sep 09. 2021

어른을 위한 동화(16)

레이나 이야기

레이나는 푸른 망토를 두른 채 검정 베일로 눈만 드러낸 율리아와 마주 앉았다.

짙은 갈색의 머리칼은 짧아져 있었고 하얗던 피부는 검게 타 있었지만 멀리서부터 율리아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율리아로부터 온 서신을 받았을 때, 레이나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끊임없이 방 안을 맴돌았다. 온갖 상상을 했다. 율리아가 신녀가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 누군가의 계략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그 필체는 분명 율리아의 것이었다.   

 

“진짜 올 줄은 몰랐어.”    


레이나의 심장은 가쁘게 뛰고 있었지만 침착하게 말했다. 아주 작은 동요도 느낄 수 없도록 주의했다.

율리아를 붙들고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았다. 하지만 이곳은 혼자 사는 곳이 아니었다. 레이나가 사는 곳이지만 아직 완벽하게 레이나의 편이라고 할 만한 사람을 추려내지 못했으니 쌍둥이 동생이 칼을 차고 돌아왔다는 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오랜만이야, 레이나.”    


차를 내놓은 하녀들이 돌아가고 응접실에 둘만 남게 되자 율리아가 검은 베일을 벗었다. 레이나의 심장이 가쁘게 뛰었다. 태양빛에 검게 탄 율리아의 얼굴을 보자 겨우 그런 모습이 되려고 집을 나간 거냐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레이나는 목소리가 커지지 않게 주의했다. 오랫동안 기다려 온 순간이었지만 상상하던 것보다 훨씬 비현실적이었다.    


“아무도 널 여자라고 생각하지 못했어. 멀리서 볼 땐 말이야.”    


“그래? 머리가 짧아서 그런가?”    


“칼을 차고 있으니까.”    


“살아남는 게 중요한 나라에서 지냈어. 그 나라에선 남녀를 가리지 않고 자기 몸은 스스로 지켜야 하더군.”  

  

“사람들은 네가 신녀가 된 줄 알아.”    


“그렇게 믿도록 내버려 둬. 난 어차피 다른 곳으로 떠날 테니까. 그게 레이나 너에게도 좋을 거야.”  

  

“알아. 나도 널 곁에 둘 생각 없었어.”    


율리아와 레이나의 눈이 마주쳤다. 레이나는 율리아가 찾아온 이유를 알고 싶었지만 먼저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율리아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고 그녀의 마음의 빛은 본 적 없는 짙은 빛깔로 뒤덮여 있었다.  

  

“아직도 사람들 마음의 빛을 봐?”    


“응.”   

 

“어때, 난?”    


“낯설어, 율리아. 처음 보는 색들이 섞여 있어서.”    


“검은색은 모든 색을 담고 있더군. 모르던 것을 알게 되니, 두려운 것도 사라졌어.”    


“검은색이 두려움이라고 말하고 싶은 거야?”    


“검은색은 낯선 모든 것이야. 모두가 자라면서 가질 수밖에 없는 색이고.”   

 

“그래, 가족을 버리고 떠나서 알게 된 게 겨우 그런 거구나.”    


율리아가 살짝 미소 지었다.     


“맞아. 3년이 지나서 내가 알게 된 건 고작 그런 거야.”    


“네가 미워 율리아. 난 네가 미워서 소리치고 찻잔을 집어던지고 네게 물을 뒤엎고 싶어.”    


“그렇게 해.”    


“그럴 수가 없어. 너도 알잖아.”    


“공작부인이라서? 웃기는 이유야.”    


“네가 겨우 두려움을 없애려고 3년을 떠도는 동안 난 내가 원하는 걸 이뤘어. 네가 없는 동안 혼자서 이룬 일이야. 이걸 위험에 빠뜨리는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게 할 거야.”

   

“어째서 그게 네 마음보다 소중해야 해?”    


“오, 율리아. 넌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네가 너만을 위해 가족들을 버렸을 때, 난 우리 가문을 지키기 위해 강해졌어. 후작의 딸로 머물면서 내가 누군가가 따가길 바라는 꽃처럼 살았을 거라 생각하지 마. 너만큼 나도 강해졌어.”    


“네 말이 맞아, 레이나. 우린 강해지는 방법이 달랐을 뿐이야.”    


“네 선택은 결국 후회로 끝날 거야.”  

  

“어째서?”   

 

“네 망토는 깨끗하지만 낡았어. 내 기억에 그 망토는 우리를 지키던 엘시오라는 사내의 망토야. 말해봐, 율리아. 네 남편이 죽은 거야. 그렇지?”    


“맞아. 엘시오는 죽었어. 하지만 우린 행복했어.”  

  

“더 이상 가질 수 없는 과거의 행복만큼 잔인한 건 없지. 넌 평생 그 이상을 가질 수 없을 테니.”    


“아니, 틀렸어. 엘시오와 내게 함께 하는 동안 나는 행복했어. 엘시오와 함께라서 행복하기도 했지만 사실 나는 내 새로운 면을 알아가는 게 더 좋았어.”   

 

“그렇다면 도망까지 갈 정도로 사랑했던 건 아닌 게 되어버리지.”   

 

“아니. 난 남편이 나보다 중요하지는 않았을 뿐이야.”    


“오, 율리아. 이 미련한 것. 모든 귀족 부인들이 남편을 자기보다 귀히 여기는 건 아니야. 다만 그걸 이용할 뿐이지.”    


“엘시오와 나는 행복했어. 나는 그 사람 없이도 살아남을 수 있고 먹고살 수 있어. 난 그런 사람이 된 거야, 레이나. 나는 그를 이용하고 싶지 않았어. 우린 그냥 삶의 순간을 함께 한 동반자였을 뿐이야. 그리고 그 순간은 정말 완벽했어.”    


“바라는 게 적은 사람은 언제나 쉽게 완벽을 얘기하더구나. 율리아 넌 그런 애였어. 바라는 게 적은 사람. 쓸데없는 생각에 너무 많은 힘을 쓰는 사람. 받아들이면 될 것을 굳이 답을 찾으려 하는 사람.”  

  

“난 바라는 게 적은 게 아니야. 그냥 내 마음을 속이고 싶지 않을 뿐이지.”    


“현자의 삶이구나, 율리아. 후대에 길이 남을지도 모르겠어 너의 모험담이. 그런데 어쩌지? 남편이 죽은 여자의 삶에 누가 그리 관심을 갖겠어? 어쩌면 죽은 요나스 공작 부인과는 대화가 통할지도 모르겠구나.”  

  

“우리 대화는 같은 곳을 맴돌 거야. 애초에 원하는 게 달랐으니까. 난 다른 사람의 인정 따위는 애초에 필요치 않았어. 그래서 관심도 필요가 없어. 그게 너와 내가 가장 많이 다른 부분이지.”    


“그래서 넌 가족을 버릴 수 있었던 거야, 율리아. 난 너를 용서할 수 없을 거야.”    


“난 용서를 구하기 위해 여기 온 게 아니야.”    


“그럼 왜 왔어? 내게 네 남편이 죽었다는 걸 알리려고? 돈을 구하려고? 아니면 하룻밤 묵을 곳이 필요해서?”  

  

“네가 보고 싶어서야. 그냥 그게 다야.”   

 

“오, 율리아. 그건 거짓말이야. 넌 궁금했던 거야. 내가 얼마나 불행할지.”    


“너와 다른 삶을 사는 내게서 불행을 확인하고 싶은 건 너야 레이나. 내가 아니야.”   

 

“넌 불행해. 그냥 네가 인정하지 못할 뿐이지.”    


율리아의 눈빛이 흔들리기를 기대했지만 여전히 또렷하고 분명했다. 마치 예상했다는 듯이.   

 

“날 미워하게 만들어서 미안해.”    


“그런 말 듣고 싶지 않아. 그만 돌아가. 조금 있으면 남편이 돌아올 거야. 나와 똑같이 생긴 짧은 머리 여자를 봤다간 추궁할 게 뻔해.”    


율리아는 담담히 베일로 얼굴을 가렸다.   

  

“잠시 왕국에 머물 거야. 다시 찾아오진 않을게. 혹시 내게 할 말이 생기면 저잣거리 가장 끝쪽, 여행자들을 위한 여관에 서신을 보내.”    


레이나는 율리아를 쳐다보지 않았다. 바로 떠나버리길 바라면서도 한편으로는 한 번 더 율리아를 볼 수 있길 바랐다.


날 미워하게 만들어 미안하다니. 이건 지난 3년간 레이나의 마음에 피어난 온갖 감정들을 향한 변명밖에 되지 않았다. 


레이나의 머릿속에서 율리아는 눈물로 용서를 구하기도 했고 냉정하게 평생을 돌아오지 않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렇게 담담하게 찾아올 줄은 몰랐다. 날 미워하게 만들어 미안하다는 말에는 더 이상 율리아를 원망할 수 없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그 말을 들은 사람을 작게 만드는 말이었으니.


레이나는 율리아가 떠나고 남은 자리를 멍하니 쳐다봤다. 좀 더 마음을 추스를 시간이 필요했지만 곧장 하녀들이 들어와 응접실을 치우려 했기에 마음을 다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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