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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거문고 Aug 23. 2021

어른을 위한 동화(8)

플레아 이야기

저잣거리 고아로 태어난 아름다운 여자. 플레아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들을 고아원에서 함께 자란 여자들을 통해 분명히 알고 있었다. 


대부분은 ‘로즈’라는 성을 떼어내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가장 좋은 방법은 혼인이었다. 

최고로 성공했다고 일컬어지는 ‘로즈’는  ‘세레나 로즈’다. 오십 세가 넘은 애드리안 남작의 눈에 들어 후처가 된 경우였는데 운 좋게도 아들을 낳아 재산까지 일부 상속받았다. 


짙은 흑발에 모든 것을 알아버릴 것만 같은 흑안. 사람들은 플레아가 분명 세레나만큼이나 성공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플레아는 세레나가 가진 것들을 원하지 않았다. 눈치 빠르고 똑똑한 덕에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을 뿐이다. 


플레아는 세레나만큼 로즈를 떼어내는 것에 필사적이지 않았다. 로즈로 사는 삶은 불편한 것이 많았지만 덕분에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것은 장점이 분명했다. 


“그거 알아? 남쪽 사막을 건너면 나오는 어떤 나라에 여자들은 모두 흑발에 흑안을 가지고 있대. 넌 분명 그 나라의 피를 이어받았을 거야.”


로즈는 모두 자신의 태생을 궁금해했다. 세레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세레나는 늘 책을 읽었고 플레아에게 자신은 어느 나라의 태생이라는 상상을 하기를 좋아했다. 플레아는 태생에는 관심이 없었다. 태생보다 분명한 것은 누구도 원치 않는 아이였다는 것이니까.


“그랬을지도 모르겠네.”


“궁금하지 않아?”


“내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


“자기 뿌리를 아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해. 아니면 자기 자신을 잃게 된다고.”


“자기 뿌리를 아는 건 로즈가 아닐 때만 가능해. 그걸 알아야지.”


“넌 날 불편하게 해. 왜 내가 하는 모든 것에 반대하는 거야?”


“그러는 넌 그걸 알면서 왜 매일 내게 찾아오는 거야?”


세레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 플레아를 무시했다. 애드리안 남작의 후처가 되었을 때 성으로 비밀리에 초대받은 적이 있지만 거절했다. 


플레아는 자신이 불편할 정도로 사람들의 마음을 빨리 알아챘고 로즈로 살아가면서 그들의 마음에 쓸데없는 기대를 하지 않을 정도로 단단해졌다.


플레아는 커다란 바구니에 꽃을 담았다. 로즈 고아원에서 키워진 꽃들로 향료를 만들어 팔기 시작한 것도 아름다운 꽃을 묶어 팔기 시작한 것도 모두 플레아였다. 그 덕에 플레아는 지금 혼자서도 충분히 먹고살 만큼 여유로웠다. 


게다가 왕실로부터 보조금을 받아 로즈 보육원의 실질적 운영을 맡게 되어 세레나와는 또 다른 의미의 성공을 이루었다. 어린 플레아가 꿈꾼 삶은 눈치 보지 않고 자기 스스로 먹고사는 것이었고 정말 그렇게 되었다. 


때로 어렴풋이 어떤 갈망 같은 것이 올라올 때도 있었다. 누군가와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 때도 있고 어딘가 떠나보고 싶기도 했지만 지금껏 홀로 이뤄온 것을, 책임져야 할 것들을 버릴 수는 없었다.


바구니에 향료와 꽃을 놓고 한창 장사를 하고 있을 때 리아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전보다 훨씬 수수한 옷차림이었다. 


“왔군요.”


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플레아는 리아의 짐을 낚아채 이리저리 살피기 시작했다.


“이 그림들은 여기서 팔리지 않아요.”


“누군가 알아봐 줄 거예요.”


플레아가 리아의 옆에 앉았다.


“이 그림은 아름다워요. 하지만 아름다운 걸 사라고 사람들에게 강요할 순 없어요.”


“아름다운 건 모두 사고 싶어 하잖아요.”


“아뇨. 필요한 게 우선이죠.”


“당신의 꽃은 필요해서 사나요?”


“꽃은 당신의 그림 값의 절반에도 한참 미치지 못하지요. 게다가 향료를 사면 꽃을 무료로 주고 있어요.”


“그럼 그림값을 꽃값만큼 받으면 되겠지요.”


“그랬다가는 이 값비싼 재료들을 사지도 못하겠지요.”


“그럼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죠?”


“사람들이 원하는 걸 그려요.”


“사람들이 뭘 원하나요?”


“이를테면 이번에 왕세자비 후보로 오른 레이아나 공 작가의 둘째 영애님 얼굴이라던가 막 열 살이 되신 왕녀님의 얼굴이지요. 당신은 귀족가에서 태어나 자랐으니 그분들의 실제 얼굴을 잘 알겠지요? 누구보다 잘 그릴 수 있어요.”


“하지만 그 그림들을 그려 파는 건 무례한 행동이에요.”


“오, 부인. 그들도 좋아할걸요. 누군가가 나의 얼굴을 원한다니! 날 이토록 숭배하다니! 얼마나 멋진 일인가요!”


“한때 친우였던 그들을 배신할 수는 없어요.”


“그게 왜 배신인가요? 애초에 무얼 믿으셨다고.”


“우린 서로에게 좋은 사람이었어요!”


“그 시간은 돌아오지도 않을 테지만 부인, 사라지지도 않아요. 걱정 말아요. 그 시간이 행복했던 건 사라지지 않아요. 지금 부인은 그 시간이 돌아오길 바라니 그들을 위하고 싶은 거예요.”


“난 그들을 여전히 사랑해서 그들을 위하고 싶어요.”


“선을 넘는군요, 부인. 그들은 당신의 사랑을 더 이상 바라지 않을 텐데요.”


리아의 머릿속에 마리아나와 샬롯, 그리고 수많은 귀족 영애들이 떠올랐다. 어쩌면 플레아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이제 그 누구도 그 시간을 바라지 않을지도.


“우는 건가요, 부인?”


“당신은 날 몰라요. 모든 상황을 다 안다고 생각하지만 지금 내가 얼마나 아픈지 모른다고요.”


세레나가 종종 했던 말이었다. 사람들은 애틋한 감정 때문에, 쌓아온 추억 때문에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을 내리곤 했고 그 사람들에게 깊이 관여하지 않고 선을 긋는 것이 플레아가 살아남은 첫 번째 방법이었다. 


깊이 관여하는 순간 함께 휩쓸리기 때문이었다. 플레아는 리아에게도 선을 그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어쩌면 이것이 운명일지도 모른다. 모든 것을 혼자 이룬 플레아가 부족한 한 가지를 운명이 가져다준 것일지도.


“그래요. 나는 당신이 아니니 당신 마음을 알지 못해요. 하지만 그건 모두가 마찬가지인걸요. 모두가 다른 사람을 알지 못해요. 그러니 알아달라고 말할 생각 하지 말아요.”


“왜 날 도와준다고 한 거죠? 날 더 아프게 하기 위해서인가요?”


“그럴 리가요. 솔직히 말하지요. 난 당신이 부러워요.”


“부럽다고요?”


“그래요. 부러워요. 당신은 모든 걸 잃었고 이제 구속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잃을 게 없지요. 정말 자유로운 거예요.”


“난 모든 걸 가진 순간에 가장 자유로웠는걸요.”


“지금의 아픔이 걷어지고 나면 알게 될 거예요. 진짜 자유가 뭔지. 아직은 아픔이 두렵겠지요.”


“당신은 나보다도 더 자유로운데 왜 내가 부러운 거죠?”


“난 이제 책임질 게 많아요. 더 이상 나의 시간을 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지요. 당신은 달라요. 난 그래서 당신이 부러워요.”


“당신이 솔직하게 말하니 나도 솔직히 말할게요. 난 당신의 말이 믿기지 않아요.”


“부인, 인정해야 해요. 당신은 참 많은 것을 가졌고 몽땅 잃었어요. 그리고 아픔은 옅어질 거고 새로운 경험들을 하게 될 거예요. 그 삶이 생각보다 멋질지도 모르지요.”


“난 모든 걸 잃었고 그래서 아직 슬퍼요. 어떻게든 살아남고 싶지만, 막상 뭘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매일 무너져 내려요. 어떻게 멋진 가요, 이 삶이?”


“과거의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당신을 원하지 않는답니다. 그들을 놔줘요. 자유롭게.”


“그들을 잊으면 정말로 만날 수 없게 되는걸요.”


“잊을 수 없지요. 추억은 사라지지 않아요. 매일 그들을 슬프게 기억하지 말아요.”


플레아가 리아의 손을 잡았다. 누군가에게 이런 따뜻한 행동을 해 본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새로운 경험에 마음을 열어요. 새로운 사람들을 데려다 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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