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아 이야기
언젠가 마리아나에게 주었던 그림들을 한 장씩 넘겨보았다. 맹세코 불순한 의도는 하나도 없었지만 그런 의도로 해석이 되었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마리아나와의 추억을 떠올리다 까무룩 잠이 든 리아는 빈 위를 자극하는 빵과 버터 냄새에 눈을 떴다.
“아가씨, 일어나셨어요.”
“샬롯?”
성에서 요리를 하던 샬롯이었다.
“아가씨께서 굶고 계실 것 같아 음식을 좀 가져왔어요. 딱한 우리 아가씨.”
마리아나가 해 주었던 충고가 문득 떠올랐지만 샬롯은 성에서 음식을 하던 충직한 하녀였고 자신을 해 할 이유가 없는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자신이 걱정되어 음식을 가져왔다는 그 정성을 비꼴 이유가 없었다.
“고마워, 샬롯. 사실 오늘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어.”
털어놓고 나니 더 배가 고팠다. 샬롯이 내미는 빵과 버터를 허겁지겁 먹어치웠다.
“성의 모든 사람이 떠나버리고 혼자 남아 계시다는 말을 들었어요.”
“맞아. 얼마 전 이네트가 떠나고 이제 정말 혼자 남았어.”
“제가 종종 음식을 챙겨드릴게요. 하녀들이 드나들던 후문이 아직 열려있던걸요. 계속 열어두시면 제가 몰래 와서 음식을 드릴게요.”
리아는 샬롯의 말에 눈물이 흘렀다.
“고마워, 샬롯. 만약 남편이 살아있다면 네게 큰 상을 내렸을 거야.”
샬롯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아가씨는 아직 아름다우시니 분명 새로운 짝을 만날 수 있을 거예요.”
“아니야, 난 다른 사람을 바라지 않아.”
“하지만 아가씨, 이 큰 성과 곱게 자란 아가씨를 지켜 줄 누군가가 필요한걸요.”
“마리아나의 말로는 나 혼자 이 성에 평생 살게 될 거래. 난 이미 반역자의 아내이니까.”
“시간이 지나면 모두 잊을 거예요. 아가씨는 그저 시간이 지날 때까지 여기 머물기만 하시면 돼요.”
“정말 그렇게 생각해, 샬롯? 넌 나보다 나이가 많으니 세상을 많이 겪었겠지. 네 말을 믿어도 될까?”
“물론이죠, 아가씨. 아가씨의 무고함을 모두가 알게 되면 다시 아가씨는 예전처럼 무도회에 가고 그림을 그리면서 지낼 수 있을 거예요.”
“마리아나는 이미 내게 마음이 떠난 것 같은걸. 누가 나와 함께 해 줄까.”
“그때가 되면 마리아나 아가씨도 미안해서 무릎 꿇고 빌 거예요. 다시 친하게 지내자고요. 사실 마리아나 아가씨의 기품이나 외모는 아가씨에 비하면 댈 것도 아닌걸요. 타고 난 태생도 아가씨가 더 우월하지요.”
“난 그런 비굴한 사과를 바라는 게 아니야, 샬롯. 우리가 다시 예전처럼 같이 웃을 수 있길 바라는 거야.”
“오, 우리 착한 리아 아가씨. 한 번 그 사람의 진심을 알고 난 이후라면 예전과 똑같이 돌아가기는 어렵답니다. 진심을 잊으려 해도 잊히지 않지요. 대신 더 좋은 사람들이 아가씨의 주변에 나타날 거랍니다.”
“마리아나가 아니라면, 내 남편 요나스가 아니라면 새로운 사람은 필요 없어.”
“겪어 보지 않으면 모를 일이지요. 아가씨가 저의 충직함을 이제야 알아보시듯, 새로운 사람들은 어쩌면 지난 사람들보다 아가씨에게 필요한 사람일 거예요.”
“나는 그들이 필요해. 내게는 과거를 보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아. 두려워 샬롯. 나는 너무 두려워.”
샬롯이 리아에게 다가가 살며시 리아의 등을 다독였다.
“아가씨, 괜찮아요. 더 좋은 일이 있을 거예요.”
“더 좋은 일은 있을 수 없어. 이미 요나스가 죽었어. 나는 남편의 무덤을 봤다고!”
“아가씨,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 순식간에 가진 것을 잃어버리는 것은 아주 슬픈 일이지요. 얼마나 두려울까요. 하지만 그 두려움이라는 것도 겪어보면 별것이 아니랍니다. 저는 혼인식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이 저를 떠났어요. 말도 없이 떠나버렸지요. 뱃속에 아이를 품어보지도 못하고 지금껏 혼자 살았지요. 남편이 버린 여자이니 어느 누가 저를 새롭게 품어줄까요. 그렇게 지금까지 남을 위한 요리를 하며 품삯을 받아 삶을 이어왔어요.”
“남편이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아보지 못했구나.”
“그렇지요. 어쨌든 행복을 꿈꾸었던 저에게 현실은 가혹했지요. 아가씨, 두려움은 버티면 옅어진답니다.”
“두려움을 알고 싶지 않아.”
“이미 아시는걸요.”
“싫어. 나는 이 기분이 끔찍해.”
“아가씨는 남들이 평생을 열심히 살아도 이루지 못할 것들을 다 누리셨지요. 억울해 마세요.”
“억울한 게 아니야, 샬롯. 넌 모르는구나 나의 마음을. 나는 내 것을 빼앗겨 억울한 게 아니야. 내가 사랑하던 것들이 사라져서 슬픈 거야. 그래, 샬롯. 나는 억울한 게 아니라 슬픈 거야.”
“아름다운 마음이에요, 아가씨. 어쩌면 지금 같은 상황에 억울함 대신 슬픔을 더 많이 느끼는 것도 지금껏 사랑받은 일이 많아서겠지요.”
“그게 나의 잘못은 아닌걸.”
“아가씨의 곁을 둘러싸고 있던 그 수많은 귀족 아가씨들을 떠올려 보세요. 그들 모두는 아가씨가 죗값을 치르는 중이라 생각할 거예요.”
“그들도 어쩔 수 없는 거야.”
“쉿, 아가씨. 이제 진정하세요. 이 포도주를 드시고 한숨 주무세요. 자고 나면 훨씬 개운할 거랍니다.”
리아는 순순히 샬롯이 따라주는 포도주를 마셨다. 달큼하고 알싸한 느낌이 위장을 적셨다.
“맛이 독특해.”
“아가씨를 위한 특별한 것이 들어갔으니까요.”
“고마워, 샬롯.”
리아는 금방 잠에 빠져들었다.
깊은 잠에서 깨어난 리아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어딘지 모르게 스산한 기분이 들었다. 창문을 연 채 잠든 탓인지 살짝 어지러웠다. 그러다 엉망이 된 방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온갖 드레스들이 흩어져 있었다. 리아의 심장이 가쁘게 뛰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걸음을 옮기며 리아는 성안에 있던 귀한 물건들이 사라진 것을 확인했다. 한때 요나스에게 사랑의 증표로 선물 받았던 보석들도, 왕국의 유명 화가가 그린 그림도, 아름다운 장식품들도. 모두 사라졌다. 그제야 리아는 샬롯이 돌아온 이유를 알게 되었다. 리아는 주저앉아 소리 내어 눈물을 쏟아냈다.
리아는 증오와 미움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사람들에 대한 미음과 증오가 들끓었다. 혼자 이 성에 남겨두고 떠난,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사람들. 이네트과 마리아나, 샬롯. 그리고 요나스까지. 한때 당연히 자신의 곁을 지키리라 생각했던 사람들이 사라지고 나자 리아는 무작정 그들에게 기대고 싶었다. 더욱 간절하게 그들을 원했다.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없다는 직감이 간절함이었구나.
리아는 간절하게 그들을 떠올렸다.
그러다 문득, 마리아나가 떠올랐다. 언젠가 아이를 원하는 마리아나에게 말한 적이 있다. 왜 그렇게 간절하게 사냐고. 리아는 누군가의 간절함을 이해하기에는 고통이 부족했다. 세 아이에 대한 걱정으로 늘 피곤한 이네트에게 넌 너무 걱정이 많다는 이야기를 설교처럼 늘어놓기도 했다. 마치 세상을 다 안다 생각하는 다섯 살처럼.
‘미안해... 미안해...’
누구에 대한 사과인지 모르지만 리아는 무작정 미안하다는 말을 되뇌었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미움과 증오, 애정과 집착, 죄책감과 애틋함이 차례로 지나가고, 리아는 결정해야 했다. 마리아나의 말대로 성의 문을 잠그고 이곳에서 죄인처럼 살거나 성을 떠나야 한다.
리아는 성에 남아 있는 옷가지들 중 저잣거리에서도 그다지 튀지 않을 만한 수수한 옷을 몇 벌 골라 가방에 담았다. 그리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릴 도구를 챙겼다.
요나스의 유품 중 샬롯이 가져가지 못한 반지도 챙겨 넣었다. 이제 그 반지가 이 성과 리아의 추억을 이어주는 유일한 것이 될 터였다.
문을 열었다. 마리아나의 말대로 정원은 엉망이었다. 시들어버린 꽃과 멋대로 자란 잡초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나의 정원이라고 소개했지만 정작 리아의 손길은 그저 향기를 맡을 때 밖에 닿지 않았던 정원. 리아는 미련 없이 성을 빠져나왔다. 생각나는 곳은 이네트의 집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