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아 이야기
리아는 울다 지쳐 잠들었다가 창으로 새어 들어오는 햇볕에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숨 막히는 적막이 가슴을 짓눌렀고 머릿속을 헤집는 과거의 기억들이 리아를 괴롭혔다.
‘이네트...’
요나스가 아닌 이네트를 떠올릴 줄은 몰랐다. 모두가 사라져도 남아있을 줄 알았던 이네트마저 떠나자 리아는 비로소 절망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왜 나 혼자 남겨진 거야? 도대체 왜 그런 거야?’
언제나 미련 없이 떠나는 쪽은 리아였다. 누군가를 먼저 찾아 나선 적도 없었다.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소리로 북적였던 세계가 리아가 있던 곳이었지만 더 이상 그 세계에 발을 들일 수 없게 되었다.
차라리 요나스의 말을 듣지 않았더라면, 그 글과 그림은 모두 내 것이었다고 사실대로 말했더라면 남겨진 쪽은 요나스였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지금보단 행복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당신이 순수해서 좋아. 당신을 보고 있으면 모든 걱정이 사라지는 것 같아. 내가 평생 동안 지켜줄 거야.’
요나스가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리아는 그 말에 감동했지만 은연중에 당연한 말이라 생각했다.
요나스는 왕국에서 인정받는 신의 있는 사람이었고 그런 남편을 만난 자신 역시 꽤 좋은 사람일 테니.
사람들은 아름다운 두 사람이 만나 평생 행복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고 그것은 리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차라리 내가 죽어버렸다면 더 좋았을 뻔했어. 평생 내 옆을 지켜주겠다더니 그건 지킬 수 없는 약속이었어.’
요나스가 죽은 후 처음으로 원 없이 그를 원망하면서 리아는 다시 흐느껴 울었다.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혼자 머릿속의 생각들과 싸워야 하는 자신이 한심했다.
한참 흐느껴 울던 리아는 배가 고파 부엌으로 갔다. 하녀들로 북적였던 곳은 그녀들이 떠나자 그저 어둡고 스산한 공간일 뿐이었다. 부엌의 조리대 위에 아네트가 구해 온 감자 다섯 알이 보였다. 하지만 문득, 이 감자를 어떻게 조리하는지조차 알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너무 배가 고파 생으로 감자를 베어 먹을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때, 갑자기 다급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이네트!’
그럼 그렇지. 이네트가 이렇게 쉽게 떠날 리 없다는 생각을 하며 리아는 잠옷 차림인 것도 잊고 문을 열었다.
“마리아나!”
문 앞에 서 있는 것은 수수한 베이지색 드레스를 입고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피고 있는 마리아나였다. 리아가 반색하며 마리아나를 끌어안으려 했지만 마리아나는 리아의 몸을 밀치며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네가 올 줄 알았어!”
“쉿! 조용히 해, 리아!”
마리아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어 리아는 자기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마리아나는 늘 웃는 모습으로 자신을 대했다. 때로 슬픈 이야기를 하며 우는 모습을 보인 적도 있었지만 화를 낸 적은 없었다.
“시간이 없어. 마부가 날 기다리고 있어.”
“그렇게 빨리 가야 해?”
“난 지금 놀러 온 게 아니야, 리아! 정신 차려!”
“알아. 날 보러 왔잖아. 그걸로 충분해.”
“널 보러 온 게 아니야.”
“그럼?”
마리아나가 품속에서 종이 무더기를 꺼내 리아에게 건넸다. 리아가 그린 숲 속 소녀 이야기의 삽화였다.
“이건 내가 네게 준 선물이잖아. 너와 날 생각하며 그린 그림이야.”
“제길, 리아! 정신 차려! 언제까지 모른 척할 셈이야? 이 그림 때문에 네 남편이 죽었어. 난 널 위해 이 그림이 네 것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이 그림이 내게도 있는 걸 들키면 나까지 같이 죽는 거야. 모르겠어? 너 때문이야, 리아. 모든 게 너 때문이라고!”
마리아나의 날 선 목소리가 리아의 마음을 할퀴었다.
“요나스도 너도 이 이야기를 좋아했어.”
“사실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아. 왕은 네 남편의 덕망을 두려워했고 흠집을 찾고 있었어. 그러다 고결하신 요나스 공작의 흠집을 발견한 거야. 바로 너 말이야.”
“진실은 언제고 밝혀질 거고 그럼 내 남편의 명예도, 나의 삶도 돌아올 거야.”
“모두가 사실이 아니길 바라는 진실은 소용이 없어.”
“좋아했잖아, 내가 만든 이야기를.”
“그건 아름다운 공작부인이 만든 의외의 이야기였기 때문이야. 너다운 이야기였지. 하지만 리아, 지금 그 이야기는 혼자 남은 불쌍한 공작부인이 평생 감춰야 할 비밀이 되어버렸어.”
마리아나는 리아의 손에 선물 받았던 삽화들을 쥐어주었다. 리아의 손이 떨렸다.
“네가 오는 순간을 꿈꿨어. 매일매일. 이런 식은 아니었지만 말이야.”
리아의 목소리가 잠겨있었다. 마리아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너였다면 리아, 내게 미안해할 거야. 너 때문에 피해받은 사람들을 생각해 봐. 넌 누군가의 애정을 배신했어. 내가 너라면 미안해서 평생 고개도 들지 못할 거야. 어떻게 성에 오라는 말을 할 수 있어?”
“내가 원한 게 아니고 내 잘못이 아니야.”
“네가 의도치 않았더라도 때론 너도 운명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해. 넌 그게 운명이야. 딱 그까지인 거야.”
리아가 들은 말 중 가장 잔인한 말이었다. 이런 운명은 꿈꿔 본 적이 없었다.
“마리아나, 네게도 닥칠 수 있는 일이야.”
“그렇다면 리아, 난 너보다 현실 파악을 잘할 거야. 고개 숙이고 죄인처럼 살 거야.”
“죄인이 아닌걸. 나는 누구보다 사랑하는 나의 남편을 잃었고 친구도 잃었어. 혼자 남겨졌어. 이네트마저 날 버렸고. 도대체 어떤 벌을 더 받아야 해? 내가 하지도 않은 잘못에 말이야 도대체 어떤 벌을 받아야 해?”
“내게 죄책감 느끼게 하지 마, 리아. 난 내 남편을 지켜야 하고 나를 지켜야 해. 알잖아. 네 잘못이 없다고 내 입으로 말할 수 없어. 그런 말을 바라는 게 너의 가장 큰 잘못이야. 사실 너도 헷갈리면서 말이야.”
“이네트가 말했는걸.”
리아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리아, 만일 네 스스로 널 믿었다면 그렇게 간절하게 날 기다리지 않았을 거야. 넌 약해 빠졌어. 네가 키우는 저 꽃처럼 여리고 쉽게 꺾여버리지. 네가 경황이 없고 마음이 아프다는 이유로 버려버린 정원을 좀 봐. 내게 자랑하던 아름다운 정원이 지금은 시든 꽃으로 뒤덮여버렸어. 넌 겨우 그 정도인 거야. 혼자서는 꽃 하나 키우지 못하는. 넌 이미 반역자의 남겨진 아내이고 그렇게 살아야만 해. 평생을 말이야.”
마리아나는 다시 문을 열고 나가려다 말고 리아를 바라봤다.
“네게 남은 마지막 애정으로 한마디만 할게. 리아, 이 성엔 더 이상 누구도 찾아오지 않을 거야. 찾아온다면 네게 남은 마지막 자존심마저 털어버리려는 사람일 테니 함부로 문을 열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