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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거문고 Oct 06. 2023

나의 난소생존기(4)

위로받는 삶에 적응하기

 내가 생각한 최악의 일들이 현실에 일어나는 것을 확인하는 것은 내 생각보다도 훨씬 드라마틱한 일이었다. 막상 산정특례 대상자가 되어서도 나는 내가 항암치료를 받는 암환자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러다 처음으로 실감한 것은 타인에게 내 상황을 설명하면서였다.  


 조직검사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설마' 하는 생각에 수술 후 휴식에 필요한 정도로만 휴가를 낸 상태였고 몇 주 후면 나는 직장으로 돌아갈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고 나는 항암을 받는 6개월간 휴직을 해야 한다는 말을 하기 위해 상사에게 연락해야 했다. 

 가볍게 안부를 주고받다가 조직검사 결과를 이야기하자마자 깜짝 놀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 후 이어질 어색한 침묵을 떠올리며 나는 최대한 밝게, 낙관적 이야기를 전했다.  


 "어쨌든 항암 받고 나면 호르몬 치료받으면서 추적검사만 하면 된대요. 죽지는 않을 것 같아요. 걱정 마세요." 


내가 농담으로 한 이야기에도 웃음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무조건 많이 먹고 힘내서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치료받아요." 


 그 말을 듣자마자 눈물이 터졌다. 암환자로서 받는 첫 번째 위로였다. 그리고 그 어느 말보다 지금의 내 상황을 객관적으로 들려주는 말이기도 했다. 나는 항암을 받아야 하고 그 과정을 견뎌야 하며 앞으로도 수없이 이런 위로의 말들을 들어야 한다. 

 

 나는 남에게 폐를 끼쳐야 하거나 도움을 요청해야 하는 상황을 불편해한다. 나로 인해 피해받는 상황도 싫어한다. 그만큼 나에겐 내 영역이 중요했다. 자칫 잘못하다간 상대에게 지나치게 내 것을 내어주거나 불필요할 만큼의 죄책감을 느끼게 된다. 어느 순간, 타인을 향한 경계는 더 굳건해져서 작은 빈틈조차 없을 만큼 혼자의 삶에 익숙해졌다. 내가 폐를 끼치지 않아도 되고 상대로 인해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고, 불필요할 만큼 타인의 입장을 헤아릴 필요도 없는 삶. 오직 내 마음만 들여다보면 되고 나만 잘 챙기면 되는 삶. 아주 가까운 타인에게만 마음을 내어주는 정돈된 상황이 좋았다.


 만일 이 지루할 만큼 정돈된 생활이 흐트러진다면, 그건 절대 나로 인한 것은 아니리라 여겨왔다. 하지만 정확히 다른 누구도 아닌 나로 인해, 내 삶은 모두 흐트러졌다. 나와 조금의 연관이라도 있는 타인은 내 소식을 들었고 내게 연락을 해오며 나를 염려했다. 내 머릿속은 그들을 내가 무너진 모습을 보일 수 있는 사람, 적당히 솔직할 수 있는 사람, 낙관적인 소식만 전해야 할 사람, 적당히 안부인사만 나눌 사람으로 나누었다. 때로 나로 인해 걱정하게 되는 게 싫어서 말을 아끼기도 했다. 어떻게든 상황을 다시 정돈하고 싶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마저 오만한 생각이었다. 어떻게 정리해도 내 상황은 변하지 않을 것이고, 예전의 나로 돌아가기보다 새로운 상황에 빠르게 적응하는 게 더 나은 방법이었다.


  도움받는 삶, 위로받는 삶에 적응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타인의 염려가 진심으로 나를 위한 것임을 받아들이는 것도, 내가 돌려주지 못할지라도 도움을 받아야만 할 때가 있다는 것도 서서히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러면서 세상과 타인에 대한 나의 경계는 허물어졌다. 인정하기 어렵지만, 이게 암환자가 되어 얻은 첫 번째 배움이었다. 누군가와 도움을 주고받고 삶을 나누는 것. 그게 바로 세상에서 균형을 잡는 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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