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거문고 Oct 08. 2023

나의 난소생존기(5)

항암 후, 일상에 적응하기

 나는 잘할 줄 알았다. 아무렇지도 않을 줄 알았다. 하지만 막상 머리가 빠지기 시작하자 마음에 지진이 일어났다. 잘할 수 있어. 괜찮아. 이미 알고 있었잖아. 마음과는 달리 빠진 머리칼을 정리하는 내 손은 떨렸다.

1차 항암 후, 열흘 정도가 지나자 머리칼이 빠지기 시작했다. 빠지는 속도나 양으로 인해 슬프다기보다는 무서웠다. 이렇게 한 번에 많은 양이 빠져도 되는 걸까 싶었다. 머리 밑이 훤히 보일 정도로 탈모가 진행되었을 즈음, 나는 삭발을 하고 가발을 맞췄다. 내게 어울리는 가발을 맞춘 것만으로도 마음은 한결 편해졌다.


 하지만 가발은 어떻게 해도 내 눈에 부자연스러웠다. 용기 있게 가발을 쓰고 밖으로 나가기까지도 꽤 시간이 걸렸다. 사람들은 신경도 쓰지 않았지만, 나는 그들의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무심결에 귀 뒤로 넘기는 손길,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정돈하는 행위.  행동 하나하나가 세심하게 보였다. 습관적으로 귀 뒤로 머리를 넘기려 하면 가발의 안감이 느껴지고 바람이 세면 혹여나 가발인 게 티가 날까 염려하는 나로서는 그 모든 자연스러움이 모조리 다 부러웠다.  


 평소 본래의 내 머리칼을 좋아하지 않았다. 가느다란 반곱슬은 손질도 까다로워 그냥 방치해 두곤 했다. 하지만 풍성하고 멋들어진 가발보다 본래 내 머리카락이 더 귀한 걸 잃고 나서야 알게 됐다. 한동안은 집에서조차 삭발한 내 모습이 익숙하지 않아 면으로 된 비니를 꼭 쓰고 지냈다. 먼저 항암을 받은 직장 동료가 가장 큰 스트레스는 단연 탈모라고 했었는데 그때 난 그 말을 흘려들었다. 난 그렇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항암을 받기 전의 나는 정말 오만했다는 걸 겪으면서 점점 더 느끼게 됐다.


 삭발 후, 가까운 사람들 역시 나가 그제야 내가 암환자라는 걸 실감한 듯했다. 집에 온 친척은 애써 괜찮은 척을 하거나 어깨를 다독이곤 했는데 말없는 위로의 행위들이 나를 더 작아지게 만들었다. 그 모든 행위들이 하나하나 날카롭게 와닿았고 위로를 받을 여유조차 없는 내 자신에게 화가 나 더 움츠러들었다.  

 이렇게 한껏 움츠러든 날에는 방에 틀어박혀 일기를 쓰거나 드러누워버렸다. 잠이 오지 않아도 눈을 감았고 여전히 암환자라는 진단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해 '괜찮다'는 말 뒤에 숨는 나를 발견했다. 마음이 마구 널뛰었다. 어떤 날의 나는 살아있다는 것에 감사해 세상 모든 것에서 아름다움을 느꼈고 또 다른 날의 나는 주저앉아 울고 싶었다. 오락가락하는 내 모습이 나도 낯설 정도였다.  


 체력 관리를 위해 꾸역꾸역 가발 위에 모자까지 눌러쓰고는 사람이 드문 바닷가로 산책을 갔다. 거의 매일 같은 길을 오가며 머릿속을 정리하려 했다. 조급했다. 괜찮다는 말을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했지만 소용없었다. 마음 깊은 곳에서 나조차 그 말을 의심하고 있었다. 평정심을 찾고 싶고 일상을 되찾고 싶었다. 수술만 하고 나면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항암을 받을 땐 거기만 집중하면 될 줄 알았는데. 한 단계를 넘을 때마다 정돈되길 바랐던 상황은 늘 새로운 형태로 나타났고, 나는 그 모든 것이 불안했다.

  

 날이 선선해지자 바다엔 서핑을 즐기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가발을 쓰고 그 위에 모자를 눌러쓴 채, 가만히 멈춰 서서 파도를 바라봤다. 내 눈엔 어제의 파도나 오늘의 파도나 별 다를 게 없어 같게 보였다. 높은 파도는 서핑하는 사람들을 기쁘게 만들었고 그들은 여유롭게 파도를 타거나 때로 흔들리며 넘어지기도 했다. 그들은 매 순간 새로운 파도를 기다렸다.  

 지금껏 나는 삶에 주어지는 파도를 기대한 적이 없다. 내게 파도라는 건 늘 고통이라는 감각과 닿아있기 때문이었다. 섬처럼 사람들과 동떨어져 그 모습을 보다 나도 모르게 기도라는 걸 했다. 이번 파도를 잘 넘겨 일상을 살아가게 된다면, 그땐 내게 주어지는 모든 걸 기대하는 삶을 살아보겠다고. 그러니 제발 내게 이 파도를 넘을 담대함도 함께 달라고.


작가의 이전글 나의 난소생존기(4)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