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개장 한 그릇
내가 원하는 과로 서울에서 대학을 가긴 성적이 조금 힘들었고, 그래서 서울 외에 다른 지역으로 대학 진학을 고려해야 했다. 별 고민 없이 경상도로 가겠다고 정했다.
할머니가 끓여주시던 닭개장 한 그릇 때문이었다.
우리 할머니는 경상북도 하양 분이셨다. 우리 아빠는 막내아들, 위로 누나가 다섯이다. 매 명절이면 고모들은 시댁에 가느라 늦게 왔고, 할머니 댁엔 할머니와 우리 가족뿐이었다. 할머니의 명절 음식은 늘 추어탕이었다. 추어탕 한 솥 가득. 그런데 사실, 아빠랑 나는 추어탕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도 할머니가 해주시니, 큰 내색 않고 먹기를 몇 년. 아빠가 어느 해에 할머니한테 털어놓았다.
"엄마! 내는 추어탕 안 좋아하는데 왜 맨날 추어탕만 해주노! 나는 닭개장 좋아하는데, 왜 매 해 오면 추어탕만 가득이고! 나도 엄마 닭개장 먹고 싶다!"
다음 해부터는 하양에 내려가면 닭개장 한 솥, 추어탕 한 솥이 있었다. 할머니가 끓여주시던 닭개장은 정말 맛있어서 머무는 이틀 동안 내내 닭개장만 먹어도 질리지 않고 맛있었다. 첫 입 넣으면 매워서 살짝 기침이 나지만, 칼칼하고 얼큰한 그 맛이 좋았다. 국물을 떠먹다 보면 수저에 걸리는 닭고기 살도 오래 끓여 퍽퍽하지 않고 부드러웠다. 엄마와 아빠는 할머니께 닭개장의 비법이 뭐냐고, 전수해달라고 졸랐지만 할머니는 엄마와 아빠가 결혼한 지 20년이 되면 알려주겠다고 하셨다.
그 해는 내가 17살, 엄마와 아빠가 결혼한 지 18년이 되던 해였다. 어느 때처럼 명절에 할머니 댁에 내려가 닭개장을 먹는 중이었다.
"어미야. 닭개장 비법은 사실 미원이다. 고기 요리에는 미원을 좀 넣어야 맛있다."
우리는 무릎을 탁 쳤다. 할머니 닭개장의 비법이 미원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뭔가 건강하고 향토적인 재료들로 육수를 우린다든가, 예상치 못한 재료를 넣는다든가, 그런 것일 줄 알았는데 미원이라니! 넷이서 식탁을 사이에 두고 그 날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그 일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할머니는 갑자기 돌아가셨다. 집에서 빨래를 널다가 뒤로 넘어지셨는데, 그 일로 병원에 입원하시고 급격히 건강이 안 좋아지셨다. 우리 할머니는 80세가 넘으셔도 정말 장장하셨다. 호랑이를 닮은 우리 할머니는 언제나 강인하셨고, 집의 기둥 같은 분이셨다. 그게 할머니와 보내는 마지막 명절이 될 줄 정말 몰랐다.
살면서 처음 간 장례식장이었다. 모든 것이 낯설고 어딘가 불편했지만, 무엇보다도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묵묵히 서서 손님을 맞이 하는 아빠를 보면서, 어른의 모습이란 저런 건가 속으로 짐작만 할 뿐이었다. 마지막 날, 손님을 다 보내고 엄마와 아빠와 구석에 앉아 육개장을 먹기 시작했다. 그때 갑자기 아빠가 엉엉 울기 시작하셨다. 살면서 아빠가 그렇게 목놓아 우는 건 그때 본 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이제 울어도 되는구나 싶어서 나도 함께 펑펑 울었다.
무엇이 그리 슬펐냐면, 그냥 육개장의 빨간 국물이 참을 수가 없었다.
우리 할머니는 호랑이처럼 강인한 분이셨다. 어릴 때, 할머니 댁에서 아빠와 할머니와 셋이 자는데 집에 도둑이 든 적이 있다. 거실에서 주무시던 할머니는 베란다 난간을 타고 올라오는 도둑을 보고 호통을 치셨다.
"니 여기가 어디라고 몰래 쳐들어오나. 썩 안꺼지나!"
놀라서 자다가 그 소리를 듣고 아빠와 뛰쳐 나갔는데, 도둑이 관을 타고 다시 내려가더라. 그때부터 내게 세상에서 제일 쎈 사람은 우리 할머니였다. 할머니와 함께 있으면 세상 모든 것으로부터 나를 지켜주실 것 같았다. 그래서 대학을 경상도로 진학했다. 가까운 가족 한 명 없고 살면서 가보지도 않은 도시였지만, 하양 근처였다. 더 이상 하양에 우리 할머니는 없지만,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할머니가 나를 지켜주실 것 같았다.
우리 가족은 더는 명절에 하양에 가지 않는다.
집에서 할머니가 가르쳐주신 비법대로 미원을 넣고 닭개장을 끓여봤지만, 할머니가 끓여주시던 그 맛이 나지 않는다. 몇 시간을 펄펄 끓이던 할머니의 사랑과 계량 없이 대충 넣던 할머니의 손맛이 비법이었지, 마지막에 조금 넣던 미원 따위가 비법이 아니었다.
또 그 닭개장 한 그릇이 생각보다 얼마나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던지. 닭을 삶아 식힌 다음 결대로 손으로 하나하나 찢어야하며, 잘 빻은 고춧가루로 재료를 한 데 모아 버무려야하며, 그러고도 한참을 냄비에 팔팔 끓여야 비로소 그 익숙한 닭개장 한 그릇이 된다.
우리 할머니가 항상 내게 입버릇처럼 하시던 말이 있다.
"아가, 너무 애쓰며 살지마. 너무 열심히 살지마."
그때는 사실 그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노력하면 뭐든지 다 내 뜻대로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던 어리고 고집 있던 시절이었다. 애써서 이룰 수 없는 일이란 세상에 없다고 믿었다.
이제 어느덧 내가 스물다섯 살이 되었다. 여전히 너무 애쓰며 살고 있다. 이제는 세상 일이 내가 노력하는 대로 결과가 얻어지는 것도 아니고, 세상엔 내 노력으로 되는 일보다 노력해도 어쩔 수 없는 일들이 많다는 것을 안다. 그래도 여전히 애쓰며 살고 있다.
'할머니. 너무 보고 싶어요. 미원을 넣고 끓여도 닭개장에서 그 맛이 안 나요. 20년이 되면 비법을 알려준다고 하셨는데, 사실 미원이 아니라 다른 게 더 있었던 거 아니에요? 꿈에라도 한 번 나와서 알려주세요.'
할머니의 그 닭개장이, 맵다며 휴지를 찾으면 다음번엔 조금 덜 맵게 끓여주겠다며 이야기하시고는 매 번 맵던 그 닭개장이, 유독 그리운 날이다. 참 맛있는 닭개장이었다. 살면서 그런 닭개장은 아마 다시는 먹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