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와 한국의 거리두기

파파 이중섭

by 소단

<파파 이중섭>을 읽다 책을 덮어버렸다.

슬퍼서가 아니라 화가 나서였다.


이중섭은 일본에 있는 가족을 그리워하다 끝내 정신이 무너질 지경에 이르렀다.
그를 돕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또 한 편으로 그를 둘러싼 사람들은

그가 일본으로 가기 위해 어렵게 마련한 뱃삯을 마련할 때마다
어떻게든 그 돈을 가져다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쓸 생각으로 혈안이었다.


그에게 마침내 또 한 번의 아니 그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가 왔다.

고이 품은 품 안에 뱃삯은 내일모레면 꿈에도 그리는 아내와 아이들에게 데려다줄 참이었다.


그의 친구라는 작자가 그의 집 앞까지 따라와

고비를 향한 마지막 다섯 걸음만 남겨두고,

이중섭의 착한 심성을 이용해

그 속에 품고 있던 돈봉투를 기어이 꺼내게 만드는 장면에서

나는 힘껏 책을 덮고 말았다.


나는 그 장면을 멈추고

돈봉투를 그 비정한 친구에게서 빼앗아서 그에게 쥐어주는 상상을 했다.


“이게 당신이 살아갈, 당신이 그토록 그리워하는 아내와 아들을 만날 마지막 기회예요!”

라고 그의 눈을 보고 간절히 외치고 싶었다.


도대체 왜 아무도 멈추지 않았을까.

왜 그 누구도 “이건 아니다”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가는 최소한의 길조차 지켜주지 못했을까.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캐나다가 떠올랐다.

이곳에서는 요청하지 않으면 그 선을 잘 넘지 않는다.

상대방의 권리를 침범하는 일도 흔하지 않다.

“그건 네 몫이야”라는 말이

차갑게 들릴 때도 있지만, 그 말 덕분에 사람들은 서로를 삼키지 않는다.


반면 이중섭이 살던 당시의 한국 사회는
개인의 고통이 개인의 것이 아니었던 시대였다.

가난도, 책임도, 감정도 모두 함께 짊어져야 한다는 명분 아래 개인의 경계는 쉽게 무너졌다.

연대는 서로의 삶을 지켜주기도 했지만,

때로는 한 사람의 파멸을 부르기도 했다.


그 시대를 지금의 기준으로만 비난할 수는 없다.
살아남기 위해 서로에게 기대야 했던 현실,
혼자서는 버틸 수 없었던 사회 구조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해와는 별개로 나는 여전히 그 장면이 견디기 힘들다.


한 사람의 삶이 ‘남의 눈’과 ‘관계의 의무’ 속에서
끝내 숨 쉴 공간을 잃어버린 것 같아서다.


어쩌면 그 불행은 아직도 완전히 끝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여전히 “이 정도는 괜찮지 않나”
라는 말로 타인의 경계를 쉽게 넘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누군가는 위안을 얻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소리 없이 상처받는다.


물론 캐나다의 개인주의가 언제나 정답은 아니다.
외로움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할 때도 많다.


하지만 한가지 분명한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적절한 거리는

서로를 지켜주고 보호해준다는 것이다.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건강한 관계는 그 사이 어딘가에 있다.


좋은 사회란 서로를 얼마나 많이 끌어안느냐보다

각자의 위치에 선 사람들을 존중하며

제자리에서 서 있도록 지지해주는 것이 아닐까.


그러고 보니,

앞서 돈봉투를 끌어다가 이중섭 선생님께 쥐어드리고자 하는 내 충동도

이미 선을 넘는 행동을 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그가 선택한 인생을 존중해주어야 하는 걸까.

어둠의 시대도 덮을 수 없어 빛이 났던 순수한 예술가.

바다 넘어 가족을 매일 그리며 눈물로 그림을 그렸던 가여운 사람

그러나 자신의 방식대로 사랑하고 사랑받은 사람


그가 마지막으로 홀로 바라보았을 바다가 눈에 선해 먹먹해진다.


‘우리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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