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시절 실습을 하게 된 곳이 있었어요. 복다복닥 발 디딜 틈 없는 곳에서 자수성가 하셔서 해운대 신도시로 이전한지 얼마 되지 않은 가족같은 분위기의 병원이었습니다.
이 '가족같은'이라는 말은 참 다양하게 해석 될 수 있는 형용사지요. 이 병원에는 자그마한 거인 원장님과 그 원장님의 직장 와이프들, 오래 일한 직원 2명이 같이 계셨어요. 정말 가족같이 점심때는 밥솥에 밥을 해서 같이 먹었고, 종이 한장, 휴지 한장도 허투루 쓰지 않는 가장의 근검 절약한 정신을 가족 모두가 나타내고 있는 병원이었습니다.
서울대를 나오신 실력도 출중하시고, 유머도 있으신 원장님은 자그마한 체구로 진료실을 날아다니시면서 환자들을 지극 정성으로 돌보셨죠. 그리고 직원에 대한 애정도 대단하셨어요. 아들과 동갑인 저를 딸처럼 여기셨죠.
근무하는 마지막 날 바다가 보이는 횟집에서 제가 좋아하는 멍게, 해삼을 사주시며 용돈을 좀 더 넣었다는 급여 봉투를 건네시던 모습. 졸업하면 꼭 다시 돌아오라며 집 앞까지 바래다 주시던 원장님의 모습이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있습니다.
설렁설렁 심각한 일도 없을 것처럼 항상 수월해 보이시던 원장님이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일을 그르치는 거래처에 불같이 화를 내는 모습도 볼 수 있었어요.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였죠. 거짓말을 하고 병원을 빠졌던 직원도 있었는데 정말 눈물 쏙 빠지게 혼쭐을 내실때는 부모님 같은 마음 없이 저런 말을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했던 것도 같습니다.
저도 일적인 면을 배울 때 혼나기도 했겠지만 지금은 그런 기억은 없고, 착한 딸?이었던 저는 원장님이 참 좋았습니다.
단, 한가지만 빼고요. 직장 내에서 성적인 농담을 하는 것이 저는 싫었습니다. 그런 것을 하하 호호 웃어 넘기고 싫으면서도 싫은 티를 온전히 내지 못하는 다른 직원들의 분위기도 싫었습니다. (저한테는 하지 않으셨지만요) 나중에 사회 생활을 해보니 그런 말 하지 않는 사람은 아주 귀하더군요.
저는 졸업을 하고 그 병원에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저를 좋게 봐주신 것은 너무 감사했으나 딱 두가지가 걸렸습니다. 토요일 근무와 그 불편한 농담들이었어요.
하지만 저는 원장님께 직장 상사 이상의 정이 많이 들었기때문에 그 결정을 내리는데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또 결정을 내리고 나니 쉽더군요. 다시 찾아가고 싶은 마음도 많았지만 그렇게 찾아가는 것은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차마 잘 찾아뵙지 못했습니다.
졸업을 한 후 저는 해운대 해변의 아름다움을 그것도 매일 다른 경관을 감상 할 수 있는 창이 넓은 직장으로 들어갔습니다. 이후에 원장님이 그 경치를 월급에 포함시켜서 생각하는 말을 하는 것을 들었을때 그 아름다음은 조금 반감되긴 했습니다.
역시 좋은 집안에서 엘리트 코스를 밟은 원장님은 제가 싫어하는 성적인 농담은 단 한번도 하지 않으셨지만 굉장히 직원들에 대한 소통과 배려가 힘든 분이었습니다. 항상 사람의 긍정적인 면을 보려는 저는 처음에는 느끼지 못했습니다. 원장님을 그렇게 말하는 직원들이 이상해 보일 정도였죠.
하지만 어느 날, 자신이 시켜서 한 일로 인해 직원이 힘든 상황이 되었을 때 그 모든 책임을 직원에게 전가하고 매몰차게 모른척 하는 모습을 보고 저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1년 정도 일하다가 모았던 돈으로 제가 가고 싶었던 중국으로 가게 되었지요. 그리고 1년 뒤 돌아와서 제가 좋아하는 실장님이 아직 그 곳에 있어 다시 잠깐 일하게 되었는데 원장님은 변한 것이 없으시더군요.
어느 날, 제 동료의 마음 고생 하는 모습으로 보고 직원들이 모두 있는 장소에서 아쉬울 것이 없는 저는 원장님께 바른 말을 해버렸습니다. 무슨 일이었는지 잘 기억은 안나는데 뭔가 그 싸늘한 분위기와 모든 직원들의 숨죽이고 있던 분위기가 기억이 나네요.
침묵 끝에 원장님은 그러면 우리가 함께 일할 이유가 없지 않겠냐는 식으로 이야기를 해서 저도 그러는게 좋겠다고 하고 그날로 나오게 되었어요. 저는 그냥 대화를 하려고 했던 것 뿐이었는데 직원이 하는 제안은 상사에게는 반역 정도로 여겨지는 것 같아요.
호주를 다녀와서 면접을 보러 갔던 날, 처음 뵜던 원장님은 저의 얼굴을 보시자마자 얼른 고개를 다시 모니터로 돌리시더군요. 나중에 알고보니 제가 아주 마음에 들으셨던 표현이었습니다.
여러가지 문제가 있어 직원들이 못견디고 나간 병원에 가서 청소부터 병원 정리, 데스크, 환자관리, 수술, 진료, 재료 관리 등 모든 것을 도맡아 하다보니 금융치료만이 답은 아니었습니다.
청소만은 업체를 통해 해서 병원 관리에 더 신경 쓸 수 있게 해달라는 말이 사무장님께 통하지 않아 울고 나오던 제 모습을 본 원장님은 다음날 청소 업체를 부르셨더군요.
몸이 몇 개라도 남아날 것이 없던 그 시절 저를 버티게 해 주었던 것은 원장님의 진심어린 마음과 배려 그리고 인정이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몇 년 뒤 캐나다를 가겠다는 저를 원장님은 잡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이렇게 곳곳을 돌아다닌데는 나름의 이기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아, 처음에는 차를 사줄테니 가지말라고 하셨군요ㅎㅎ하지만 나중에는 마음 편하게 가도록 해주셨어요)
그리고 몇 년 뒤 어느 날 병원에 아이스 와인을 들고 찾아갔는데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었을 때, 저는 실감이 나지 않았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어딘가에서 또 저를 보며 씨익 미소를 띄며 잘 왔다고 웃으실것만 같은 원장님이 많이 보고싶습니다.
저번에 한국에 나갔을 때 치료를 하기 위해 처음 실습했던 그 병원을 찾았습니다. 사실은 오래 전부터 찾아뵙고 싶었는데 치료를 핑계삼아 뵙고 싶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한국은, 아니 세상은, 아니 나는 너무나도 많이 변했는데 원장님의 병원은 그 옛날 그대로의 모습이었습니다. 다른 병원들은 모두 번쩍한 리모델링을 했던데 원장님 병원은 빛 바랜 캐비넷과 데스크가 있었습니다. 온기가 있었고 따뜻했습니다.
원장님은 제가 실습때 십자수를 놓아 차에 두는 번호판을 선물로 드렸던 것을 아직도 가지고 계신다고 하는 말씀에 왈칵 눈물이 나왔습니다. 그것이 아직도 마음속에 담고 있었던 원장님을 졸업후 찾아뵙지 못한 미안함과 죄송함이었는지.. 아니면 사뭇 변해버린 내가 그 순수한 시절에 대한 애틋함과 그리움에서였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얼마 전 지인의 아이가 자폐, 아스퍼거 증후군 증세가 있어 여러가지 대화를 나눈 적이 있어요. 그 친구들에게 수학이 쉬운 이유는 명료한 답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그 반대로 그 친구들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인간 관계라고 했습니다. 뭔가 정의를 내리기가 애매모호한 인간 관계, 명료하지 않은 옳고 그름에 대한 사람에 대한 기준. 그 아이들에게는 풀지 못하는 숙제와 같은 것이죠.
최근에 있었던 사건은 14살인 그 아이가 반에 데이트를 하는 아이들에게 욕을 하며 그런 행동은 나쁜 행동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 친구에게는 그것이 용납 할 수 없는 일이었던 것 같아요.
저는 그 친구처럼 명료하게 답을 내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생각이 나는 상사를 떠올리며 잠이 오지 않는 것일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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