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생각없이 들었던 펀드가 올랐다. 모아둔 돈에 보태어 600만원을 가지고 더 늦기 전 호주로 떠나기로 했다. 25살 이전에 영어와 중국어를 어느 정도 하겠다는 인생의 목표를 더 미룰 수 없다고 생각했다.
워킹 비자를 받았지만 외국인 앞에만 서면 붙어있는 입 때문에 일단 어학원을 3개월 다니기로 하였다.
어학원에는 다양한 나라에서 온 아이들이 있었다. 이 아이들은 분명 나랑 수준이 비슷해서 같은 반을 들어 온 것일텐데 왜 이렇게 말을 잘하지?
강사에게서 던져지는 질문 하나에 나는 예스 or 노 라는 단답형 다음에는 떠오르지 않는데 어떻게 저렇게 많은 생각들이 청산유수로 쏟아져 나오는지 신기했다.
3개월간 가지고 갔던 돈은 빠르게 소진되고 통장에는 100불이 채 되지 않는 9자로 시작하는 숫자가 떳다. 이력서를 100장은 돌린 것 같은데 아무데서도 연락이 없었다.
남은 비행기표로 한국을 돌아가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어느 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넣었던 한인 청소 업체에서 연락이 왔다. 영어를 배우려고 간 곳이기에 처음에는 절대 한국 사람이 있는 곳에 일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었지만 그 다짐은 빈 통장 앞에 조용해졌다.
그렇게 극적으로 잡을 구하게 되어 첫 출근을 한 곳은 걸어서 40분-50분 거리의 한 펍이었다.(맥주집) 차비를 아끼려고 걸어갔더니 다리는 벌써 출근하자마자 힘이 풀린 것 같다. 하지만 그 다리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어깨에 메는 무거운 청소기부터 바닥 물청소에 유리병이 가득한 푸대 자루를 들쳐 메고 분리수거까지 마치고 난 후면 다리 뿐 아니라 팔까지 온 몸이 후들거렸다. 아마도 그때 몸을 아끼지 않고 깡으로 버텼던 그 시간이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지병의 원인이 되었을거라 생각은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침에 출근하면 후들거리던 다리는 점점 단단해져 제법 다리 위 풍경까지 즐기면서 출근길의 풍경을 즐기기도 하였다. 그 때 같이 일하던 네팔에서 온 친구들도 좋아서 지금도 생각이 나곤 한다.
또 시간이 흐르자 나는 집 근처 스시집에서 일하게 되었고 또 몇 개월이 지나서는 룸메이트 친구의 추천을 받아 치과 대학 병원에서 일 할 수 있게 되었다.
고생도 많이 했지만 그만큼 인생에서 소중한 친구들을 많이 만났고 3개월만에 돌아갈뻔 하던 나는 워킹 비자 만료 1일 전에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재촉하며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내 힘으로 한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호주에서의 1년이라는 기간 동안 영어, 돈, 값진 인생 경험까지 모두 얻어 올 수 있었다.
캐나다에 살고 있는 지금도 한번씩 그 호주의 하늘, 짓궃지만 정감이 갔던 농담을 하던 사람들, 아름다운 해변, 맛있는 커피집들의 향이 나는 듯 하다.
그 중에서도 캐나다에서 호주가 가장 그리운 이유는 흠 잡을 데 없는 호주의 날씨이다. 내가 거주하던 브리즈번은 겨울이 없었다. 명의상 겨울이 들어간 달은 아침 저녁이 약간 쌀쌀한 정도였다.
4계절 내내 강가를 돌며 조깅을 할 수 있었던 그 때가 그립다. 저녁에 일했던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쥐어준 피자 한 판을 가지고 집으로 퇴근하며 물결에 비친 달빛을 보는 그 때도 그립다.
실은 가장 그리운 것은 겁없고 무엇이든 할 수 있었던 그 젊은 날의 패기와 열정, 그리고 그 시간을 함께 채워준 사람들인 것 같다.
나는 그 시기의 하루 하루를 선물처럼 살았고, 그 선물은 지금도 나에게 많은 것들을 남겨 주는 듯 하다.
나에게 주어진 오늘 하루도 그렇게 선물처럼 보내도록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먼 훗날 돌아보면 이토록 춥고 길고 아팠던 겨울도 한켠의 추억으로 남아 눈 내리는 그 풍경을 그리워 하게 될 지도 모르니 말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RJANZDO-qv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