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 호숫가에서

늦가을 호숫가를 걷는 은밀한 기쁨

by 소똥구리

누군가 일부러 그린 것은 아닐 것이다. 사람이 그렇게 할 수는 없다. 호수공원 가을 말이다. 사람들은 별생각 없이 여기저기에 느티나무, 구상나무, 밤나무, 버드나무, 벚나무 등을 심었을 것이다. 그 나무들이 가을이 되니 다양한 농도의 황갈색으로 변하고 또한 절묘하게 배치되어 그 아름다움은 뭐라 말할 수 없다. 멀리 호수 건너편에서 바라보는 가을 숲은 코발트블루와 터키블루 사이에서 한 점의 점묘화처럼 풍요롭다.


얼마나 좋은 계절인가? 가을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나도 모르게 폐 속 깊이 공기를 들이마시게 하는 이 기운은 무엇일까? 에어컨으로는 절대 만들 수 없는 이 계절의 순수한 청량감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국민학교 운동장에는 아름드리 플라타너스 나무가 삼면을 둘러싸고 있었다. 한여름 시원한 그늘을 드리워주는 플라타너스의 효용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나 실용으로서가 아니라 미학적으로 본다면 가을이야말로 플라타너스의 또 다른 절정이다. 늦가을 홍시 같은 저녁노을을 배경으로 우뚝우뚝 서 있는 가을 플라타너스의 쓸쓸함도 큰 정취이지만 아이들에게는 오직 놀이로써 의미가 있다. 가을바람이 불면 얼굴만 한 낙엽이 바람에 휘날려 떨어져 내렸다. 점심시간이면 아이들은 모두 운동장에 나가 종잡을 수 없이 흩날리는 낙엽을 잡으려 이리 뛰고 저리 뛰고 그러다가 부딪히고 깔깔대며 웃었다. 빨갛게 상기된 뺨으로 가뿐 숨을 내쉬면서도 그 누구도 멈추지 않았다. ‘땡땡땡’ 수업을 알리는 종이 치고도 한두 놈은 꼭 운동장에 남아 선생님의 미소 띤 꾸중을 들어야 했다. 그때 그 아이들의 눈동자는 쪽빛 하늘보다 깊었고 그때 들이마신 가을은 아직도 폐포에 남아 있다.


가을의 절정을 지난 늦가을 주말 아침 호수공원을 걷고 있다. 낙엽이 져서 풍만했던 단풍 숲은 빈곤하고 쓸쓸하나 나는 이 시간을 사랑하고 이 분위기가 기껍다. 사람들이 몰려드는 계절 번잡한 낮시간을 피해 늦가을 이른 아침에 가을 속을 걸으면 마음속에 은밀한 기쁨이 솟는다.


보통 중년을 인생의 가을이라 하지만 이제 가을도 지나고 겨울이 오고 있다. 계절은 겨울 지나 다시 봄이 오지만 인생은 그렇지 못하다. 한번뿐인 가을이고 한번뿐인 겨울이다. 이 늦가을 아침, 어떤 겨울을 맞이할 것인가 고심해 보지만 모르겠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이라 알 수 없다. 늦가을 아침, 떨어지는 낙엽에 손을 뻗어본다. (22.12.11, 23.11.19)



photograph by soddongguri(23.11.25)





ps. 호수공원 사진이 마음에 들지 않아 다시 찍었습니다. 호수는 코발트블루이고 하늘은 터키블루여야 하는데 지난 주에는 날이 조금 흐렸습니다. 어쩌다 감탄스럽게 아름다운 색을 보여줄 때가 있는데 카메라에 담지 못해 아쉬운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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