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게와 바지게

[양촌일기] 지게가 버티고 바지게가 끌어 안아

by 소똥구리

어렸을 때 소망 중의 하나가 내 ‘지게’를 갖는 것이었다. 동네 친구들은 모두 자기 키에 맞는 자기 지게가 있었다. 그 친구들은 함께 들로 소꼴도 베러 가고 산에 나무도 하러 다녔다. 나는 지게가 없어 빈손으로 친구들을 따라다녔다. 지게 없는 나는 아마추어였고 그들은 프로였다. 어린 나는 가끔 아버지 지게를 져보곤 했지만 지겟다리가 바닥에 끌려 허리를 숙이고 뒤뚱거려야 했다. 할머니와 어머니가 마루에 앉아 그 모습을 보며 웃으셨다.


지게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고되고 힘든 공사판 등짐과는 다르게 따듯하고 정겨운 느낌이다. 대둔산 자락 산골에 살 때 아버지는 손수 지게를 만들었다. ‘ㅏ’ 자 모양 나무 두 개를 짜구와 끌로 잘 다듬고 서로 이어 지게를 만들었다. 그리고는 볏짚을 엮어 푹신한 탕개(등받이)를 만들고 시작은 두텁고 끝은 가늘게 새끼를 꼬아 밀삐(지게 끈)를 걸었다. 쇠못은커녕 플라스틱 하나 쓰지 않은 친환경 지게였고 완벽한 균형미를 갖춘 수공예 예술품이었다.


지게의 쓰임새 또한 무궁무진하다. 맨 지게로는 짚단이나 나뭇단 같은 길이가 있는 물건을 싣거나 자루나 상자를 옮길 수 있고 때로는 아이나 새색시를 태울 수도 있다. 그러나 맨 지게는 맨 상투차림처럼 허전하다. 지게가 완전하기 위해서는 싸리나무를 엮어 만든 ‘바지게’를 붙여야 한다. 공작새가 날개를 편 듯 검붉은 싸리대살이 쫙 펴진 모습이 참으로 우아하고 아름답다. 바지게에는 콩이나 감자 같은 작은 것들도 문제없이 담을 수 있다.


나무 지게를 보면 어머니 아버지가 감당해 온 인고의 세월이 떠오른다. 우리가 겪은 IMF나 요즘 세대의 경제적 여건이 어렵다 해도 부모님 세대가 헤쳐온 시절에 비하면 호시절이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한창 먹고 꿈꿔야 할 시기에 육이오 전쟁을 겪고 육칠십 년대 그 모진 가난을 맨몸으로 싸워야 했다. 요즘의 사회경제적 어려움이 아니라 그야말로 생사를 넘나드는 위난의 연속이었다.


그러한 육십 년의 세월, 아버지는 우리 가족을 지키는 강인한 지게였다. 할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마땅히 물려받은 논밭도 없는 형편에 육 남매를 키워내기 위해서는 스스로 묵묵한 지게가 되어야 했다. 무거운 짐에 삐걱거리고 돌부리에 걸려 비틀거려도 무너질 수 없었다.


지게는 나무를 지고 볏단을 질 때는 그 자체로 충분하나 고추 모종이나 병아리 같은 작은 생명을 싣기에는 너무 성글다. 휘엉휘엉 흔들리는 나뭇지게의 갈지자 걸음에도 어린 육 남매를 보듬고 끌어안아 지켜온 것은 바지게 같은 어머니 덕분이다. 모든 것이 궁핍했던 시절 우리 육 남매를 구김 없이 당당하게 키워낸 것은 공작새 날개 같은 어머니의 넓고 따듯한 보살핌 때문이다.


지게 혼자 바지게 홀로 감당하기에 육십 년은 길고 긴 세월이고 부대껴온 시절은 너무나 거친 세월이었다. 지게가 버티고 바지게가 끌어안으며 함께 하였기에 스물넷 대가족의 일가를 이루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주말이면 육 남매는 내곡리 양촌농원에 모인다. 봄에는 달래와 씀바귀를 캐고 여름에는 복분자와 오디를 딴다. 가을에는 알밤을 줍고 단풍을 즐기고 겨울에는 비닐집에 난로를 피우고 투명한 겨울 햇살에 따사롭다. 그 중심에는 항상 어머니와 아버지가 있다. 그때도 지금도 지게와 바지게처럼 늘 함께하고 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영원히! (17.7.20, 23.11.26)



photograph by soddongguri(2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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