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촌일기] 호랑이 눈썹도 뽑아오실 할머니
다람쥐 언덕 쉼터 아래에 허리까지 자란 고사리가 뭇 잡초들을 제치고 우뚝하게 푸르르다. 고사리는 태곳적 기억을 품고 있다. 프로토케라톱스나 스테고사우루스 같은 초식 공룡 곁에 있어도 하나도 어색하지 않을 것이다.
작년 내곡리 밭자락에 고사리를 심었다. 아버지 농사일 좀 덜 하시라고 막내딸이 심은 것이다. 고추나 감자는 해마다 심고 가꾸고 거두어야 한다. 모든 과정에서 힘든 노동이 필요하다. 아버지는 세상 제일가는 농사 욕심꾼이다. 땅 한 평 밭 한뙤기 놀리지 못하고 봄여름가을 쉼 없이 심고 가꾸느라 너무나 힘이 든다. 아버지에게 농사는 노동이 아니라 춤이고 노래이다. 주말 함께 밭에 가면 아버지는 멧돼지 흙목욕하듯 온전히 흙과 하나 되어 밭고랑 속을 뒹군다.
그럼에도 세월은 골짜기 해너머 가듯 흘러갔다. 아버지도 눈에 띄게 폐활량이 줄어 일하다 멈춰 서서 가쁜 숨을 몰아쉰다. 일을 줄이시라고, 쉬엄쉬엄 하시라고 아들딸 만류에도 아버지는 콧방귀다. 마음은 여전히 청춘이다. 그래서 막내딸이 고사리를 심자는 묘안을 내었다.
고사리는 잡초처럼 잘 자라서 따로 손 갈 필요가 없다. 그저 봄에 나오는 연둣빛 새싹을 재미 삼아 꺾으면 그만이다. 관건은 과연 아버지가 고사리 심는 걸 허락하실까였다. 걱정과 달리 아버지는 너무도 쉽게 동의를 하였다. 아니 오히려 고사리 심기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농사 놀부인 아버지가 고사리 심는 걸 허락하신 건 왜일까?
큰누나와 둘째 누나는 운주면 산북리에서 태어났다. 산북리는 대둔산 자락으로 산이 깊고 높아 산나물이 흔했다. 할머니는 고사리를 모아 서울에 팔고 평화시장에서 옷을 떼다 다시 골짜기 마을마을에 팔았다. 지금이야 서울 가는 게 일도 아니지만 육칠십 년대에는 결코 쉽지 않은 멀고 험한 길이었다. 지금 같으면 이태리어 한마디 못하면서 로마에 가서 명품 옷을 사 오는 것과 다름없다.
할머니는 용감했다. 옆집 붕길이 엄마는 아들손주 위한 일이라면 “호랑이 눈썹도 뽑아올 분”이라고 말하곤 하였다. 그때 서울엔 도둑놈 날강도 천지인 것으로 알았다. 젊고 팔팔한 사촌 아저씨와 외삼촌도 서울에 갔다가 쓰리 당하고 강도를 만났던 일은 평범한 일화였다. 타고난 성품인지 할아버지의 부재로 인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인지 모르겠지만 할머니는 한 번도 두려움을 내보이지 않았다.
할머니는 무학이셨고 한글을 겨우 읽으셨지만 매우 총기 있고 기억력이 좋았다. 수첩 하나 없이 골짜기 마을 집집마다 매입한 고사리의 양과 가격 그리고 판매한 옷의 종류와 가격을 정확히 기억하였다.
올봄 처음으로 밭에서 고사리를 수확했다. 아버지와 딸들은 무채색 들판에서 초록빛으로 통통하게 올라온 고사리 새순을 꺾었다. 고사리 한 올 한 올에는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스며있다. 몇 번을 삶고 말려 둥글게 모은다. 자오선처럼 아래위로 여러 가닥의 끈을 묶고 살짝 눌러주면 고사리 뭉치가 만들어진다. 아버지는 작은 고사리 뭉치 하나를 거실 창가에 풍경처럼 달아두었다. 바람이 불면 할머니 냄새인 듯 고사리 향기가 실려 온다. (23.1.26, 12.2)
ⓒ photograph by soddongguri(23.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