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과 달과 소나무
내게 군산은 멀고도 낯선 도시였다. 평생 여행이나 출장을 가본 적도 없었다. 2012년에 갑자기 군산으로 발령을 받았다. 아들이 다섯 살, 딸이 이제 첫돌을 넘기지 않은 때였다. 아내는 둘째를 낳고 제일 힘든 때였다.
일요일 밤, 아이들을 재워놓고 열 시쯤 길을 나섰다. 수도권을 빠져나와 서해대교를 지나니 고속도로가 쓸쓸해지기 시작했다. 보령을 지날 때는 밤안개가 자욱하여 마음이 더욱 울적했고 따듯한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낯선 도시 모텔에서 새벽을 맞고는 첫 출근을 하였다. 역시나 낯선 사무실, 낯선 사람들. 어색하고 긴장한 채 하루가 지나고 숙소에 짐을 풀었다. 숙소는 15층 아파트 맨 위층이었다. 저녁을 먹고 첫날밤을 보내는데 옥상에서 휘잉 휘잉 양철 환풍기 돌아가는 소리와 바람소리가 마음을 심란하게 만들었다. 좁은 방이 왠지 서글퍼 잠이 오지 않았다. 매트리스를 끌어내 거실에서 잠을 잤다.
혼자 있으니 저녁에 시간이 많았다. 인터넷을 열고 군산에 무엇이 있나 살펴보니 시내에 커다란 호수가 세 개 있었다. 그중 제일 가까운 호수에 가보았다. 그때는 그곳이 군산에서 제일 유명한 은파호수라는 걸 몰랐다. 처음 가자마자 은파호의 매력에 폭 빠졌고 그 후 봄가을은 물론이고 더운 여름 추운 겨울에도 저녁마다 한 바퀴씩 돌았다.
은파호수는 물이 참 넓다. 물은 모든 생명의 고향이다. 물 그 자체로 묘하게 흥분된다. 호수를 바라보며 한 바퀴 돌면 시간 반이 걸리고 호수 중간의 은파물빛다리로 가로지르면 50분이 걸린다. 탁 트인 넓은 호숫가에 서면 눈이 시원하고 수면을 스치는 바람을 맞으면 몸이 가벼워진다.
호수 둘레길은 맨흙이다. 아스팔트도 싫고 폐고무로 만든 인조바닥은 더욱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은파호 구불길은 30분은 맨 흙길이고 20분은 물 위 나무다리길이다. 맨흙을 밟고 물 위 나무길을 걸으면 온전히 자연 속을 걷는 기분이다.
호수에는 달빛 또한 아름답다. 달이 떠 호수면에 비치면 난로를 켜놓은 듯 포근하다. 한 구비 돌면 사라졌던 달이 한 구비 돌면 다시 나타나길 끝없이 반복된다. 때가 되면 기러기와 청둥오리 떼가 달빛 속으로 날아간다.
호수 모양은 단순하지 않고 오밀조밀하다. 처음 걷는 사람은 눈앞에 보이는 부분만 보고 가볍게 산책을 나섰다가 끝없이 이어지는 호숫길에 놀라곤 한다. 호숫길은 물과 숲 속으로 들어가고 나오기를 반복하는 구불길이라 매일 걸어도 지루하지가 않다. 한 구비 돌 때마다 새로운 풍경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호수가에는 전망 좋은 카페도 있다. 가끔 찾던 카페는 물 들어오기 전 산골짜기 따라 생겨난 조그만 연못 같은 구비길을 돌면 있었다. 수면이 좁아 바람이 불어도 고요했고 비가 와도 사납지 않았다. 그 고요함과 평화로움은 괜한 설렘을 불러온다.
봄에 피는 벚꽃도 좋았고 초여름 바람결에 실려오는 아카시아 향기도 달콤하였다. 군데군데 무리 지어 서 있는 아름드리 소나무는 안개 낀 날 장엄하였다.
지나고 보니 모든 것이 아쉽고 그립다. 호수를 걷던 그 순간순간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그때 내 나이 마흔이었다. 나름 노숙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돌아보니 얼마나 젊고 아름다웠던 시절이었나.
군산을 떠나고 다시 한번 가보질 못했다. 그럼에도 일기예보에 군산이 나오면 자동으로 눈길이 가고 영화 속 군산의 모습을 알아보고는 홀로 반갑다. 은파호에서 만난 인연들 물결들 나무들이 그립고 그립다. (15.5.21, 23.12.3)
ⓒ photograph by soddongguri(12.4.16)
ps. 15년쯤 처음 글을 쓰기 시작하고 쓴 글부터 정리하고 있습니다. 글을 올리려 외장하드디스크에서 지난 사진을 찾아보았습니다. 예상 외로 은파호수 사진이 몇장 없더군요. 언젠가 군산에 다시 가서 호수 면면을 카메라에 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