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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잎지던날 May 30. 2018

어느 날의 동물원

늦은 밤, 아빠가 술에 취해 주정을 시작하면 엄마는 조용히 떠날 준비를 했다. 조그마한 돗자리와 모기향 하나. 그리고 어린 나를 데리고 집을 나섰다.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욕하는 아빠를 뒤로하고 엄마와 나는 건너편 주인집 옥상으로 향했다. 


옥상 한 켠에 돗자리를 깔고 모기향에 불을 붙여 놓고는 짙은 밤하늘을 이불 삼아 눕고는 했다. 엄마와 함께 바라본 밤하늘엔 모래알처럼 뿌려진 별들이 아무것도 모른 체 빛났다. 선선히 부는 바람과 시끄럽게 울어대는 풀벌레 소리. 그 틈바구니 속에서 엄마와 나는 사소한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엄마와 나는 아빠를 피해 하늘 아래 숨었다 더 이상 아빠의 고함이 들리지 않으면 조용히 집으로 돌아갔다.


아빠는 주로 밤에 술을 마셨지만 일 년에 한두 번쯤은 낮에 마실 때도 있었다. 그날도 아마 그랬던 것 같다. 밖에서 막 돌아온 내게 엄마는 말했다. 


  “동물원에 갈까?”


난 좋다며 펄쩍 뛰었다. 처음이었다. 엄마는 오래전부터 부족한 살림을 챙기기 위해 공장에 나가셨다. 그래서 나는 엄마와 단둘이 가까운 곳 어디에도 놀러 가본 적 없었다. 물론 엄마가 왜 동물원에 가자고 하는지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어린 마음에 동물원에 간다는 사실이 마냥 기뻤다.


엄마와 처음 함께 온 동물원은 무척이나 넓었다. 즐거워 보이는 사람들 속에서 엄마와 나는 한적한 동물원을 천천히 걸었다.


  “갑자기 동물원에는 왜 오자고 했어?”


엄마는 “그냥”이라며 얼버무렸다. 몰랐던 건 아니다. 아빠를 피해 이곳에 왔다는 걸. 그럼에도 엄마에게 물은 건 불안감 때문이었다. 엄마에게서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감정. 난 그 감정이 무서웠다.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서늘함. 엄마는 내가 보이지 않게 울고 계셨다. 우릴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들 사이로 소리 없이 우셨다. 

날이 저물고 엄마와 난 아무 일 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이후에도 엄마와 나는 아빠를 피해 종종 집을 나섰지만 다시 동물원에 가는 일은 없었다. 

그날을 되짚어보면 날이 흐렸는지 화창했는지, 뭘 봤고 무얼 먹었는지, 안개가 낀 것처럼 희미하다. 그저 기댈 곳 없어 헤매는 엄마의 쓸쓸함과 놓아 버릴 수 없는 어린 자식을 향한 애달픔만이 남아 있을 뿐.


작은 내 손을 꼭 잡은 엄마가 지금도 동물원 그 어딘가를 걷고 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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