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송합니다.”
또, 이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내 잘못이 아니라는 걸 머리로는 알았지만, 불편한 침묵을 견디지 못한 입이 멋대로 뱉어낸 사과였다. 거절이 어려워 끙끙 앓는 밤이 길었고, 모두가 기피하는 일을 떠맡고는 ‘이것도 경험이야’라며 억지로 웃어 보이는 아침이 잦았다. 사람들은 나를 ‘착하다’고 했지만, 사실 나는 그 말이 불편했다. 그건 착한 게 아니라, 그저 만만했던 것뿐이라는 걸 나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으니까.
만만함. 그건 일종의 갑옷 같은 것이었다. 다른 사람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관계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둘러쓴 무겁고 불편한 갑옷. 그 갑옷을 입고 있으면 적어도 미움받을 일은 없을 거라고, 그렇게 믿었다. 하지만 그 갑옷은 외부의 공격을 막아주기는커녕, 오히려 ‘여기를 찌르시오’하고 과녁을 그려 넣은 표적지가 되어버렸다. 무겁기만 했지, 아무것도 막아내지 못했다.
입사 초기를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린다. 나는 정말이지 ‘과하게’ 열심히 하는 신입사원이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가장 먼저 출근해 사무실 불을 켰고,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했다. 복사기 용지가 떨어지면 말없이 채워 넣었고, 탕비실 커피가 비면 내 돈으로 사다 놓기도 했다. 그게 사회생활의 기본이라고, 선배들에게 예쁨 받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했다.
타조부장, 아니 그때는 그냥 부장님이었던 그녀는 그런 나를 유심히 지켜보는 듯했다. 처음에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김 대리는 참 성실해.”, “싹싹해서 보기 좋네.” 나는 그 칭찬이 좋아서, 더 인정받고 싶어서 정말 몸이 부서져라 일했다. 그녀가 5분이면 끝날 보고서 양식을 앞에 두고 세 시간 동안 ‘이건 이렇게’, ‘저건 저렇게’ 수정을 지시했을 때도, 나는 그걸 ‘신입에게만 주어지는 족집게 과외’ 같은 거라고 애써 해석했다. 붉은 펜이 오갈 때마다 내 안의 무언가도 함께 그어지는 기분이었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 그녀의 말 한마디에 내 보고서는 너덜너덜한 누더기가 되었지만, 나는 밤을 새워서라도 그녀의 마음에 쏙 드는 결과물을 만들어내려 애썼다. 그게 나의 성실함을 증명하는 길이라 믿었으니까.
지금 생각하면 그 모든 것이 가스라이팅의 시작이었다. 그녀는 나의 성실함과 인정 욕구를 정확히 파고들어, 서서히 나를 길들였다. 부당하다고 느끼는 순간에도 ‘내가 부족해서 그런 걸 거야’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다른 동료들과는 다른, 나에게만 적용되는 이상한 규칙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외근을 나갈 때 유독 나만 출장기록부를 꼼꼼히 작성해서 제출해야 했고, 그 최종 결재란에는 늘 그녀의 이름이 있었다. 하지만 정작 그녀는 나중에 그걸 결재하는 걸 귀찮아하며 슬그머니 팀장에게 미루곤 했다. 그때는 그저 ‘원래 회사는 이런 건가 보다’하고 넘겼다. 그 부조리함의 칼끝이 오직 나만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면서.
만만함의 대가는 생각보다 혹독했다. 나는 서서히 ‘모두의 일’을 하는 사람이 되어갔다. 내 업무가 아닌데도 “김 대리가 잘 알잖아”라는 말 한마디에 거절하지 못하고 다른 팀의 일을 도와줘야 했다. 정작 내 일이 밀려 야근을 하는 날에도 누구 하나 알아주지 않았다. 그들은 나의 호의를 당연하게 생각했고, 나의 시간과 에너지를 존중하지 않았다. 나는 점점 웃음을 잃어갔다.
결정적인 사건은 입사하고 첫여름 휴가 때 일어났다. 오랜만에 떠난 가족 여행, 나는 모처럼 회사 일을 잊고 평화를 만끽하고 있었다. 그때 회사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갑자기 처리해야 할 급한 일이 생겼는데, 사무실에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거절해야 마땅했다. 내 소중한 휴가였고, 나는 지금 가족과 함께 있었다. 하지만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다급한 목소리에 내 입은 또 배신을 했다.
“아… 네, 제가 지금… 가보겠습니다.”
가족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 부랴부랴 회사로 향하는 내 모습은 처량하기 짝이 없었다. 몇 시간에 걸쳐 일을 마무리하고 녹초가 되어 다시 휴가지로 돌아왔을 때, 이미 분위기는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그렇게 나의 첫 여름휴가는 엉망이 되어버렸다.
며칠 뒤, 휴가에서 복귀한 나에게 동료 하나가 툭 던지듯 물었다. “김 대리, 휴가 때 회사 나왔다면서? 고생했네.” 나는 멋쩍게 웃으며 괜찮다고 답했다. 그때였다. 그 모든 상황을 알고 있던 타조부장이 지나가며 한마디를 던졌다.
“자기가 원해서 나온 거잖아?”
순간, 세상의 모든 소리가 멎고 그녀의 목소리만 날카롭게 고막을 찔렀다. 쨍그랑. 내 안에서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머리를 한 대 세게 얻어맞은 듯한 충격. 고맙다는 말은커녕, 나의 희생을 ‘네가 원해서 한 일’로 치부해버리는 그 잔인함에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그래, 내가 원해서 한 일이었다. 아무도 나에게 총을 겨누고 협박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나의 순수한 자발성이 아니었다. 거절하지 못하는 나의 만만함을 이용한, 보이지 않는 폭력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회사에 대한 모든 기대를 접었다. 희생, 헌신, 성실… 그런 단어들을 내 안에서 지워버렸다. 아무도 원하지 않았는데, 나 혼자 너무 착하고 성실한 사원을 연기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물론 그들의 잘못이 없어지는 건 아니다. 하지만 애초에 그들이 함부로 선을 넘을 수 있도록 허락한 건, 어쩌면 나 자신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만만함은, 단지 나를 피곤하게 만드는 성격적 결함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 삶에 온갖 소음과 부조리가 마음껏 드나들도록 현관문을 활짝 열어주는 것과 같았다. 그리고 그 문틈으로, 단순한 무례함을 넘어 내 영혼을 갉아먹는 것들이 스며들기 시작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