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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과 서울 고모

by 김효주

어린 시절, 명절이나 되어야 볼 수 있는 서울 고모를 그렇게도 기다렸다.


6살이 될 때까지 살았던 안동군 풍산읍. 안동시내로 이사 가기까지 어디 멀리 가본 적이 별로 없다 보니 명절날 할아버지, 할머니를 찾아오시는 고모, 삼촌을 만나는 게 나한테는 무척 큰 행사였다.


엄마는 맏며느리. 결혼하면서부터 시댁에 들어와서 사셨다. 워낙에도 솜씨가 좋으신 데다 손도 크셔서 사람들로부터 '정말 맏며느리감'이라는 말을 많이 들으셨다. 그렇게 엄마는 그 해에도 할머니의 지시에 따라 열심히 추석 준비를 하고 계셨다. 너무 어려서 엄마가 어떤 일을 얼마나 했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난다. 확실한 건 엄마가 나랑 놀아줄 겨를없이 하루 종일 일을 하고 있었다는 거다.


추석 전 날, 송편을 빚고 있던 생각이 난다. 모일 수 있는 모든 사람이 모여 있었다. 공부하러 나갔던 막내 고모도 오고, 조금 떨어진 영주에 살고 있던 숙모도 와 계셨다. 엄마와 할머니까지 4명의 여인들이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송편을 정말 많이 빚으시던 생각이 난다.


그렇게 일을 하다 보면 할머니가 말씀하신다.

"하이고, 우리 미자는 어디까지 왔을라노."

"어무이, 전화 한 번 해보이소."

막내 고모가 마냥 기다리는 할머니한테 전화해보라고 권한다.


전화를 하고 나오신 할머니가 서운한 눈치다. 엄마가 여쭙는다.

"어머님요, 형님 언제 오신다고 하디껴?"

"아직 출발 안 했단다."

할머니 목소리에 힘이 없다. 덩달아 나도 시무룩해진다.

"어무이, 그래서 언니는 언제 온다니껴?"

"어, 오늘 저녁이나 내일 아침에 올랑가 카네"

속이 상한 할머니가 말을 아끼신다. 할머니 얼굴을 보니 나도 속상해진다.


그렇게 그렇게 할머니처럼 나도 고모를 기다린다. 다른 분들은 근처에 살고 있어서 가끔 할머니, 할아버지를 뵈러 오시는데 서울에 사는 고모는 1년에 1번 얼굴 보기가 힘들다. 그래서일까, 할머니도 나도 서울 고모가 온다고 하면 그렇게 기뻤다. 그런데 아직 고모는 서울에 있단다.


하늘엔 노을이 지고 송편 위엔 불그스름한 그림자가 내리는데 고모는 서울에서 무얼 하는 걸까? 시댁에 가는 것도 아닌데 왜 안 오는 걸까?


다음 날, 여전히 분주한 엄마한테 가서 물었다.

"엄마, 서울 고모 오늘 오나?"

"아마 오시겠지."

"언제 오노?"

"글쎄, 그건 기다려 봐야 되지 싶다."


엄마가 마당에서 일할 때에도, 부엌에서 요리할 때도, 손님 오신다고 청소할 때도 자꾸 가서 물어보았다. 서울 고모는 어디까지 오셨는지. 언제 오시는지. 어린 마음에 서울 고모가 꼭 왔으면 하는 마음이 컸던 것 같다.


그리고 그 해에는 정말 고모가 오셨다. 근데 혼자 오셨다. 고모부랑 언니랑 오빠는 놔두고 혼자서. 그렇지만 할머니는 고모를 보고 너무너무 좋아하셨다. 그러자 나도 너무 기뻤다. 오랜만에 고향에 온 서울 고모까지 모든 자녀들이 함께 하는 저녁상을 받고 할아버지도 무척 흐뭇해하셨다. 그 해에는 송편을 많이 먹지 않아도 이미 배부른 것 같았다.


얼마 전에 알게 된 바로는 당시, 그리고 몇 년 전까지도 고모가 결혼 생활에 많은 어려움을 겪으셨다고 한다. 그래서 시골에 올 수 있는 상황이 되지 않거나, 올 수 있다고 해도 모든 가족이 움직일 만한 여건이 되지 못하셨구나 깨닫게 된다. 내가 명절이 되어 고모를 보고 싶은 것보다 명절날만이라도 부모님을 뵙고 싶은 마음은 고모가 더 간절했겠지.


어린 마음에 고모가 부모님이나 친척들한테 소홀하고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여겼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았음에 눈물이 핑 돈다. 그렇게 힘든 상황인 줄 그때 알았다면 입 꾹 다물고 엄마한테 '고모 언제 오냐'라고 묻지 않았을 텐데... 이번 추석엔 고모가 가족들과 함께 모여 맛난 것 드시면서 즐거운 명절을 보내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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