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회피형 인간이다. 스트레스 상황을 견디는 것을 매우 어려워하고 피하기 위해 엄청난 에너지를 쓴다. 그래서일까. 지나온 인생을 바라보면 쓴맛이 난다. 타인들의 의견에 시달리며 퇴직하는 것을 계속 미뤘던 첫 번째 퇴직도, 너무 몸이 아파서 급작스럽게 선택한 두 번째 퇴직도 터트리면 툭 터질 것 같은 검붉은 염증처럼 마음 속에 맺혀있다.
며칠 전 A(<마음이 건강한 아이로 키우는 법>에 등장)에게 어떤 일이 있었다. A가 모시는 상관이 직장 근처에서 살고 계신데, 그 분 댁의 가구를 빼고 외국으로 나가는 아들이 보내는 가구를 받아서 바꾸는 일을 하게 되셨다고 했다. 문제는 A에게 그 일을 부탁하셨다는 것이다. 나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사는 상관의 개인적인 일이 아닌가 말이다! 내 일은 아니지만 가까운 사이인 A가 고생하는 것도 속상하고, 그 상관님의 처사도 맘에 들지 않아 불 같이 화를 냈다. 가슴이 답답해졌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꺼낸 건 A의 상관을 욕하기 위해서도, A가 답답하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한 현대 사회에서 어떻게 하면 잘 넘어갈 수 있는지 A에게 배운 것을 나누기 위해서다.
왜냐하면 A 자신은 이번 이사 건에 대해 정신적인 데미지를 전혀 입지 않고 있었서다. 그 비결에 대해 물어보았다.
나오미: 이런 말도 안 되는 일들을 피하지 않고 어떻게 데미지도 없이 살아갈 수 있게 되었나요?
건강 A: 그 모든 상황과 함께 지나가면 된답니다.
나오미: 상황과 함께 지나간다고요? 무슨 뜻이지요?
건강 A: 사실 스트레스 받으면서 계속 고민하고 있는 건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죠.
나오미: 그렇죠. 해결할 수 있다면 고민하진 않겠죠.
건강 A: 그러니 벌어진 상황이나 사건은 이미 지나간 것이므로 되돌릴 수 없음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스트레스를 주는 상황, 사건, 사람을 모두 내려놓는 거죠.
나오미: 나만 내려놓는 것이 아니라 상황과 사람까지 내려놓는다는 말씀이신가요?
건강 A: 네. 이미 발생한 이상 돌이킬 수 없으니까요.
나오미: 아.. 새로운 시각이네요. 상황과 사람을 다 내려놓는다..
건강 A: 그리고 나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부분만 하고 고민을 멈추는 겁니다.
나오미: 오! 스트레스를 더 이상 받지 않겠군요!
건강 A: 그렇죠.
여기까지 대화가 이어지자 또 다른 것이 궁금해졌다. A에게 이런 기술이 생기게 된 계기가 있을 것 같아서!
나오미: 저기, 건강 A님. 혹시 그렇게 하실 수 있게 된 계기가 있으신가요?
건강 A: 계기라.. 여러 일을 만나고 살아가다보니 알게 된 것이 있었어요. 모든 일은 시간이 지난 후에는 아무 것도 아니게 된다는 거였죠. 그래서 함께 지나가기로 한 거예요.
나오미: 맞아요. 시간이 지난 후에는 아무 것도 아닌 게 되긴 하죠. 건강 A님께는 상황과 함께 지나가는 기술이 체득이 되신 모양이네요?
건강 A: 다양한 일을 겪으면서 저 역시 처음엔 스트레스도 받고 화도 났었어요. 해결 안 되는 일로 고민하는 일을 여러 차례 하다보니 '이건 내게 심리적으로 도움이 안 되는 일이구나.'라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죠. 그래서 그 후로부터는 같이 상황을 지나가기로 했답니다.
나오미: 그렇군요!
회피하는 것의 반대는 맞서는 게 아니었다. 도망가고 싶을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생겨도 발생한 일 그 자체와 함께 걸어가는 것이 내공의 원천이었다.
A는 자기 스스로 기술을 습득할 시간을 가졌다. 징징거리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의존하지 않았고, 자신에게 잘 맞는 방법을 찾아가기 위해 여러 가지로 노력했다. 결국 새로운 기술을 터득했다.
긍정적 자기 확신은 많은 일을 겪으면서 스스로 이겨낼 방법을 찾으면서 생겨난다. 다양한 시도들을 통해 자신에게 도움이 되고 편안한 것을 찾아내는 과정 가운데 세상 풍조에 더이상 쉽게 휩쓸리지 않는 자신을 바라보며 자긍심을 얻게 되는 것이다.
늘 회피하느라 삶의 모든 에너지를 낭비했던 나에게는 이런 발상 자체가 생겨날 틈이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돌아보니 교직생활을 비롯한 내 모든 인생, 돌아보니 이미 지나간 것이고, 지금에는 큰 일인 것이 없다. 검붉은 상처로 남겨진 이유는 내가 계속해서 그걸 붙잡고 있어서라는 걸 인정하게 되었다. 누군가를 붙잡고 징징대고 나면 뭔가 한 것 같았지만 마음을 지킬 기술을 하나도 습득하지 못했다.
작은 어려움을 나와 함께 넘어가고, 더 큰 것이 왔을 때 자기 자신과 같이 이겨내는 하나하나의 삶의 승리들이 모여 긍정적 자기 확신을 낳는 것이었다. 마음을 열어 트라우마처럼 맺힌 것들을 쏟아내고 흘러간 시간처럼 지나간 상황, 문제, 사람들을 나와 함께 흘려보내는 것부터 시작해보아야겠다. 아직 이 기술에 대해서는 병아리니까 서두르지 말고 하나씩 해봐야지. 나를 믿어주고 싶다. 많이 칭찬해주고 손 잡고 늘 함께 걷고 싶은 사람이, 나 자신에게 되어주고 싶다.
(이미지 출처: Pixabay@geral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