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파이어족
나는 대부분의 사회생활을 힘들어했는데, 그것이 대학사회이든 또래사회이든 대부분을 조직생활을 힘들어했다. 첫 직장에서는 일도 힘들고 인간관계도 힘들었는데 돌파구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통장에 쌓인 돈을 보면 안도감이 들었다. 매달 월급을 받아 통장에 이체하는 그 순간만큼은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회사에서 일을 하다가 엑셀을 띄워놓고 왼편에는 연도와 월을 적고, 오른편에는 한달에 저축할 수 있는 금액을 적어 엑셀의 오른쪽 하단에 검정색 십자가가 나오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클릭한 후에 죽 내리면 1년 후에 내 통장에 얼마가 있을까 계산하는 희망회로 가득한 엑셀놀이를 매일같이 하면서 1년 후에 돈이 조금 더 많아져있을 나를 상상했다. 돈이 조금 더 많아진 미래의 내 모습은 언제나 달콤했는데, 언제나 지금보다는 훨씬 나았다.
그 때 다가온 것이 주식투자였는데, 회사에서 강남살고 주식투자로 돈을 좀 버셨다더라 하는 분이 계셨다. 회사에서 유일하게 말을 걸어 주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 분의 말을 믿고 투자했다가 투자에 실패하여 결국 크게 손절했다. 나는 주식투자를 꽤 오래 했다는 사람의 숨을 1초정도 멈출 수 있는 이야기를 할 수 있는데, 그 당시 내가 투자했던 종목은 인터파크, 코스맥스, CGV였다. 2019년이었다. 지금도 코스맥스 라는 말을 들으면 본능적으로 반응하게 되는데, 최근에서야 10년전에 내가 매수했던 가격을 회복했다. 물론 나는 9년전에 손절했다. 이 일로 국내주식투자는 아닌 것 같아서 그때부터는 미국주식투자를 하기 시작했다. 미국주식투자가 국내에 활발해지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회사생활이 힘들었다. 회사에 있는 매 순간이 괴로웠다. 우울증이 왔는데, 그 당시 미워하던 사람을 죽이거나 내가 죽거나 하는 생각을 하던 시기였다. 마흔살이 된 지금은 회사 안다닌다고 굶어죽겠냐 하면서 관둘 수 있는 뻔뻔함이 생겼지만, 그 당시에 회사는 내가 가진 전부여서 회사를 관둘 생각을 하지 못했다. 괴로운 회사생활의 유일한 돌파구는 돈이었다. 돈이 많으면 회사생활을 하지 않아도 되고,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들을 보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룬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어서 무척이나 괴로워했는데, 직장도 별로고 맡은 업무도 별로지만 그래도 10억정도 있으면 스스로를 인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한 10억정도 있으면 내세울 것이 아무것도 없는 내가 그럭저럭 봐줄만 해질 것 같았다. 일도 못하고, 외모도 별로고, 인간관계도 못하지만, 10억이 있으면 다 괜찮아질 것 같았다. 그러니까 당시의 나는 10억 정도의 돈이 없으면 가치가 없다고 스스로 평가를 내렸던 것인데, 당시의 내 상태에서 10억정도 있어야 내가 좀 쓸모있는 사람처럼 느껴질 것 같았다. 그 당시 자존감이 바닥이었다.
그 때 나를 사로잡던 것이 바로 파이어족이었다. 파이어족은 노동 대신 자산에서 나오는 수익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경제적 독립을 통해 원하는 시점에 은퇴하려는 사람들을 지칭하는데, 그 당시 괴로운 회사생활을 하던 나에게는 이 파이어족이 인생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파이어족을 하려면 10억정도는 있어야 한다는데, 그 당시에는 소득수준이 낮았기에 저축속도가 느려 정년까지 회사를 다닌다고 해도 10억을 모을 수 없을 것이었다.
그러다 꽂힌 것이 배당주였는데, 근로 외 소득이 발생한다면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저임금노동자가 파이어족을 꿈꾸게 되면 자동적으로 궁상맞음이 뒤따르게 되면서 어떻게든 돈을 아껴 모으게 되는데, 당시의 나는 돈을 모아 퇴사를 하겠다는 생각이 간절했으므로 돈을 모으는 것에 혈안이 되어있었다. 나는 돈을 모으기 위해 그 어떤 것에도 돈을 쓰지 않았는데, 강박적으로 돈을 모으기 시작하면서 밖에서 생수 한병, 점심 한끼 사먹는 것조차 죄책감이 들었다. 이 돈을 아끼면 나는 더 빨리 퇴사할 수 있을텐데 하는 생각뿐이었다. 나의 좁은 세계관에서 생각해낸 유일한 돌파구가 돈이었기 때문에 그 당시에는 어쩔 수 없었던 것 같다. 돈을 모아 하루 빨리 퇴사하는 것이 간절했다.
그 때 당시 미국주식투자가 인기를 끌면서 당시에 내 눈을 끌던 종목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리얼티인컴이라는 월배당 종목이었다. 리얼티 인컴(Realty Income)은 미국 대표 리츠(REITs) 기업으로, 안정적인 부동산 임대 수익을 기반으로 매달 배당을 지급하는 종목이었는데, 꾸준한 현금흐름과 배당 성장 기록으로 배당투자자들에게 잘 알려진 주식이었다. 나는 조기은퇴를 꿈꾸며 이 주식을 모아갔다. 월급을 받으면 최소한의 생계를 위한 비용만 남겨두고 모두 이 주식을 샀다. 이번달에 산 주식만큼 다음 달에 받을 배당금이 정확하게 비례해서 늘어나는 그 안정감이 좋았다. 회사일도, 인간관계도, 내 자신도 통제되지 않는 불안한 시기에 통제 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유일한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 종목에 집착하기 시작했고, 그 집착의 크기만큼 이 종목에서 받는 월배당금액은 커져갔다. 한달에 받는 월배당금액이 10만원을 넘고, 20만원을 넘어갈 때 나는 내 인생 어디에서도 만날 수 없던 성취감을 느꼈다. 배당주와 배당금의 거래는 정확했고, 보상이 확실했다. 내 통제하에 있다고 믿었기에 이 거래는 달콤했다. 리얼티인컴 1주를 사면 다음달 월배당 금액은 세후 220원씩 늘어나는 정확함이 좋았다. 당시에 투자할 수 있는 미국주식으로는 아마존, 테슬라,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팔란티어, 일라이 일리 등이 있었지만, 그 어떤 성장주도 당장 다음달에 확실하게 주는 월배당 220원보다 더 달콤함을 주지 못했다. 어떤 것을 통제한다고 믿을 때, 사람의 시야는 이토록 좁아진다.
시간이 흘러 월배당금액은 내가 매수한 주식의 수만큼 늘어갔고, 회사일은 더 괴로워졌다. 나는 언젠가부터 한달에 50만원의 금융소득이 발생한다면, 퇴사를 하고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배당주를 모으기 위해 절약하면서 몸에 밴 궁상맞음에는 자신이 있었다. 주거는 부모님 집에서 얹혀살기로 하고, 휴대폰은 알뜰폰으로 쓰고, 보험은 최저보험료만 내고, 좋아하는 책은 도서관에서 빌려보면 되고, 영화는 명절에 공중파에서 볼 수 있다. 산책과 공원에 있는 무료 운동기구로 건강관리를 한다면 월 50만원으로 살아가는 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 같았다. 친구도 없고, 연애와 결혼은 글러먹었기 때문에 월 50만원으로 사는 것은 집에만 있는 나로써는 충분히 달성가능한 목표여서, 오히려 돈이 남을 것 같았다. 돈이 남으면 한달에 한번씩 배당일에는 치킨이나 떡볶이도 사먹을 수 있겠다는 계산이 섰다. 한가지 생각에 빠지면 다른 것은 보지 못하고 그것만을 위해 달려가는 나는 시간의 도움을 받아 결국 월 50만원의 배당을 달성했다.
월배당 50만원의 배당을 받아 회사를 다니지 않고 무료로만 연명하는 삶을 살아가려는 계획을 세웠을 때의 변수는 월배당금액이었다. 월배당주식을 처음 모으기 시작할 때에는 힘든 상황으로부터 나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월 50만원이라고 생각해서 그 목표에 매달렸다. 그 목표가 제대로 작동하는 목표였다면, 월배당금액이 50만원에 가까울수록 내 인생은 바뀌었어야 한다. 그런데 월배당 40만원을 넘어 47만원, 48만원을 달성할 때까지도 내 인생에서는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제서야 월 50만원으로 부모님 집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연명하겠다는 것에 대한 목표에 대한 의구심을 갖게 되었다.
매달 50만원만 사용하겠다는 것은 내가 세상과 단절한 채 버티겠다는 선언이었다. 사회생활에 지쳤기 때문에 월 50만원으로 세상과 거리를 두고 나를 회복하고 지켜내는 것에만 집중하려고 했다. 그러나 막상 그 목표를 채우고 나니, 돈만 가지고는 내가 원하는 삶이 채워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는 여전히 내가 경험하지 못한 좋은 것들이 많은데, 50만원으로 살아가겠다고 선언하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죽는 날만을 기다리면서 살아가겠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월 50만원에 맞춰서 책 한권도 마음 편히 사지 못하고, 무료로만 주어지는 것들로만 채워진 인생이 내가 힘들게 견디면서까지 꿈꿔왔던 인생이었는지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건 아니었다. 회사가 힘들고 인간관계가 힘들다고 해서 내 인생을 월 50만원으로 축약할 필요는 없었다. 이렇게 하라고 시킨 사람도 없고, 이렇게 되길 바라는 사람도 없었다. 정작 나 자신조차도 그렇게 되길 바라지 않았다. 아직 해보지 못한 일이 너무 많고, 세상에는 좋은 것이 너무 많은데, 월 50만원만 쓸 수 있는 사람은 최소한의 생계 그 이상의 것은 그 어떤 것도 도전할 수 없을 것이다. 누려 보지 못한 비싼 것들을 누려보고 싶었다. 그런 것들을 누려 본 적도 없는데, 누려보지도 않고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월 50만원에 내 삶을 재단하려는 일은 관두기로 했다. 언제나 지금보다 더 나아질 것이라 믿으면서 살았었는데, 50만원에 재단하는 삶이 지금보다 더 나아질 것이라는 확신이 없고, 지금보다 더 나아지기 위해서는 어쨌거나 돈이 더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 때 당시 가장 두려웠던 것은 내가 바뀌는 것이었는데, 1년, 2년 정도는 매월 50만원에 맞춰 살아가는 것이 재밌을 수도 있겠지만 그 이상은 그 결정을 후회할 것 같았다. 나는 단기간만 실현가능한 완전하지 않은 계획을 가늠할 수도 없는 긴 시간에 적용하려고 했던 것이다.
월 배당 50만원으로 살아가겠다고 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귀한 나라는 존재에게 매월 50만원만 이체해주면서 살아가라고 하는 것과 다름이 없고, 월 50만원을 초과하는 삶의 다른 모든 가능성을 차단한다는 측면에서 삶을 감옥으로 만들어버리는 것과도 같았다. 나는 당시의 힘든 상황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안정적이고 견고한 은둔지를 만들려고 했던 것이었는데, 그 은둔지는 제한이 많은 감옥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만약에 내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자식이 있었다면, 자식한테 월 50만원만 주고 살아가라고 할 수 있었을까? 부모님한테는 할 수 있었을까? 세상 그 누구에게도 50만원만 주면서 맞춰서 살아가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근데 나는 스스로 그렇게 하려고 했었다.
결국 시간의 도움을 받아 월배당 50만원을 달성했다. 그런데 시간은 월배당 50만원 외에도 다른 것들을 함께 선물로 주었다. 괴로웠던 사회생활도 5년 넘게 버티다보니 조금의 면역력이 생겼다. 회사에서 하루에 아침에 한번 저녁에 한번 울 정도로 감정과 정신력이 무너졌을 때에는 죽어야 이 고통이 끝나겠구나가 아니라 내가 앞으로 치킨은 돈주고 못사먹게 되더라도 퇴사를 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옮겨갈 수 있었다. 그리고 월배당 50만원을 받을 수 있을 만큼의 주식을 모으자 아주 조금은 돈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졌다. 만약 5천만원을 모아두었을 경우, 한달에 50만원씩 사용한다고 가정하면, 5천만원은 8년 4개월을 버틸 수 있는 돈이다. 1억을 모아두었을 경우에는 16년 8개월을 버틸 수 있으니까, 내가 너무 힘든 순간에는 10억까지 모으지 않아도 모아둔 돈을 까먹으면서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굳이 퇴사하고 월배당 50만원에 맞춰 살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그 후 시간이 흘러, 당시에 퇴사를 하면 내 인생도 끝날것 같아서 두려워했던 나는 결국 그 때 다니던 회사를 퇴사한 후, 그 뒤로 퇴사를 두번이나 더 하고 네번째 퇴사를 기대하고 있다. 그리고 돈이 없어서 미치도록 불안해했던 나는 돈에 대한 짝사랑이 부질없다는 것을 깨닫고 이제 돈에 대한 짝사랑을 내려놓게 되었다. 돈에 대한 내 사랑은 너무 지독한 사랑이었어서 내려놓는 데에도 시간이 아주 오래 걸렸다. 그리고 10억이 없어도 그냥 내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고 내 존재를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괴로워하면서까지 나를 받아들이지 않을 필요가 없어졌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이가 드니 괴로워 할 힘이 약해지기도 해서 10억이 있든 없어도 내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내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하니 10억을 번 것과도 다름이 없을 것이다. 이러한 정신승리를 할 수 있을 정도로 뻔뻔해졌다.
파이어족이 되기에는 이미 나이가 너무 들어버렸고, 모아놓은 돈도 없어서 이번 생에 파이어족이 되기는 글른 것 같다. 게다가 마흔살이 되니 내가 회사를 관둘 확률보다 회사에서 나를 자를 확률이 더 높아졌기 때문에 파이어족이라고 하는 것도 진정성을 의심받는 시점이 되었다. 지금부터 돈을 모은다면 조기은퇴가 아니라 그냥 은퇴가 되기 때문에 파이어족이 아니라 그냥 은퇴자가 되거나 파이어족 호소인이 될 것이다. 지금은 파이어족이 되고 싶다는 생각도 옅어지게 되었는데, 파이어족이 되고 나서 '그 다음엔 뭐할건데?' 라는 질문에 해답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진짜로 은퇴하려고 50만원의 월배당금액을 만들고보니 은퇴자금이 은퇴준비의 전부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지금은 누가 지금 당장 10억을 준다해도 바로 은퇴하지는 못할 것 같은데, 목표 금액이 충족되어도 10억 이후의 삶에 대해 내가 전혀 준비되지 않았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10억의 존재와는 관계없이 내가 어떻게 시간을 보낼지, 어떤 것에 의미를 두면서 살아갈지 아직은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에 은퇴까지는 준비할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