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질문
회사에 출근했다가 점심시간에 요가수업을 듣는데 아사나 동작들을 끝내고 누워서 휴식하는 사바사나를 하던 중이었다. 선생님은 이 요가센터에서 3년간 수업을 해왔는데, 이제 자기 것을 해보고 싶어서 수업을 그만두게 되었다며 여러분도 앞으로 계속 요가를 할거고, 본인도 계속 요가를 할 것이기 때문에 다시 만나게 될것이라는 작별인사를 하셨다. 자기 것을 하기 위해 요가수업을 그만둔다는 한마디가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자신의 요가를 하기 위해 관둔다는 것 같은 뉘앙스였는데, 그럼 요가학원에서 수업을 가르칠 때는 자신의 요가를 하는 것이 아니었나?하는 의문이 들어 하루종일 요가선생님의 그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요가학원을 오랫동안 다니면서 직장인이 직장을 관두고 요가선생님이 되는 것을 많이 보았기 때문에 아마 그 선생님도 첫 직업으로 요가를 가르치는 일을 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요가가 좋아서 직업을 바꾸고 요가선생님이 된 것일텐데, 요가를 업으로 하면서도 요가를 가르치면서도 자신의 것을 하기 위해 수업을 관둔다는 말이 마음속에 남 계속 곱씹어봤다. 그렇다면 요가수업은 선생님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는 것일까. 자신의 것을 하기 위해서는 요가수업을 하면 안되는 것이었을까. 여러가지 생각이 올라왔다.
지금 하고 싶은 온전한 '자신의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회사일이 아니라 글쓰기라고 대답을 할 것 같다. 회사를 관두고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물어본다면, 그것은 바로 글쓰기인데, 자신의 요가를 하기 위해 요가수업을 관둔다는 선생님의 말에 회사를 관두면 글쓰기를 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떠올랐다. 답변은 명확했다. 회사를 관둔다고 해서 글쓰기만 할 수는 없다. 글쓰기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다. 내가 언젠가 유명 작가가 되어 인세를 받는 작가가 된다 하더라도 그 인세는 일시적이다. 인세는 연금처럼 계속 꾸준히 안정적으로 들어오는 돈이 아니다. 계약을 해서 연재를 하게 되더라도 연재는 길게 지속되지 않는다. 반응이 나쁘다면 연재가 중단될 수도있다. 그리고 지금 국내의 수많은 작가들을 보면 전국의 도서관과 기업체에 강연을 다니고, 글쓰기수업을 한다. 브런치스토리만 봐도 브런치스토리 내에서 글쓰기 강의를 홍보하는 사람들도 있다. 결론은 하나다. 출간도 하고 인지도가 쌓인 작가들도 글쓰기만으로는 생계 유지가 불가능하다.
직장에 다니면서 알게된 것 중 하나는 남들이 못하는 것을 내가 해보면 좋은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믿는 것이 굉장히 위험하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노력을 덜 했다거나 운이 없어서 해내지 못한 것이 아닐 것이기에 내가 한다해도 아주 특별한 일이 발생하지 않는한 나 또한 다른 사람들과 비슷한 전철을 밟을 것이다. 따라서 내가 지금 직장을 관두고 글을 쓴다고 했을 때 내가 글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가능성은 0%에 수렴한다. 내가 글에 올인을 하든 글에 영혼을 팔아넘겨서 글만 써내든 글을 위해 무슨 짓을 하든 내가 글로 돈을 버는 일은 내 글에 돈을 지불하는 사람에 걸려있기 때문에 내가 뭘 희생했든지와 상관이 없는 것이다. 내 글이 팔릴만한 글이라면 팔리게 될 것이다. 내 글에 돈을 지불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비로소 나는 돈을 벌 수 있게 되는데, 이것은 나의 노력과는 상관없이 돈을 지불하는 사람의 선택에 걸린 일이다. 글을 쓰고 난 이후의 영역은 내 의지와는 무관하다.
그런데 내 글이 언제 팔리게 될지는 기약이 없고, 누군가에게 선택을 받아야만 하는 일이라 내가 얼마나 간절히 원하는 지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직장생활에서도 타인의 결정에 내 미래가 걸려있을 때, 얼마나 준비되었는지와 관계 없이 보장되지 않은 일에 기대를 거는 것만큼 힘든 일이 없었다. 글쓰기에도 노력이 중요하지만, 늘 노력과 비례해서 보상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러한 일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나만의 단단한 기준과 루틴이 보상이 되는 구조를 만들어, 타인의 선택과 평가와 무관하게 내 세계를 차근차근 구축해나가야 한다. 언제 선택받을지 알 수 없는, 아니 어쩌면 영원히 선택받지 못할 수도 있는 글쓰기를 하면서 내 기준을 지켜나가기 위해서는 지금의 직장생활이 반드시 필요하다. 월급으로 유지되는 단단한 일상생활이 필요하다.
글을 쓸 때의 자신있고 당당한 나와는 달리 회사에서의 나는 꽤나 우중충하고 자신이 없으며 곧 소멸될 것만 같은 상태이다. 그럴 때는 출근 안하고 하루종일 글이나 썼으면 좋겠다 싶은 날도 있다. 하루종일 집중해서 글만 쓸 수 있다면 언젠가 써야겠다고 미뤄두었던 소설의 집필도 당장 할 수 있을텐데 생각하면서 회사를 관두고 나서야 작가로서의 내 인생이 시작될 것 같은 느낌을 떨쳐낼 수가 없다. 매일 이런 마음으로 회사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회사일이 좋아서 하는 사람을 이길 수 없을 것 같다. 나는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나와 맞지 않음을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와 맞는 일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도 못한 채 나와 맞는 일을 무보수로 찾기 위해 회사를 관둘 수는 없다.
나는 불안함을 크게 느끼는 사람이라서 안정된 일상이 불확실성에 의해 흔들리는 것이 나에게 얼마나 부정적인 역할을 끼치는지 잘 알고 있다. 나에게는 글쓰기가 정말 소중하지만, 안정된 일상의 소중함이 더 크다. 이것은 현실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안정적인 일상에 기반하여 더 나아가기 위함이다. 결국 회사를 관둘 수는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글쓰기에 집중하기 위해 회사를 관둔다고 해도 경제적 기반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는 글쓰기를 유지하기 위해 글쓰기보다는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해야 하는데, 그렇다면 결국 지금처럼 회사를 다니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것이 비록 지금 회사의 일이 아니더라도, 지금의 회사일 보다는 훨씬 글쓰기와 가까워지는 일이더라도 글쓰기와 관련된 일을 하게 되는 것 뿐이지 그것이 글쓰기는 아니다. 나는 글쓰기를 하고 싶은 것이지 글쓰기 수업이나 강연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물론 언젠가 글쓰기 수업도 하고 싶고, 강연을 하고 싶기도 하며,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나 또한 성장하는 좋은 시간을 보내겠지만, 그 어떤 것도 글쓰기와 동일선상에 놓일 수 없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라푼젤』의 OST 중 〈When Will My Life Begin?〉 라는 노래가 나오는 장면에서 라푼젤은 하루종일 탑 안에서 청소하고, 독서하고, 그림그리고, 기타치고, 뜨개질하고, 요리하고, 퍼즐하고, 다트게임하고, 빵을 굽고, 종이공예랑, 발레도 하고 체스도 하고, 도자기도 굽고, 복화술 놀이도 하고, 초도 만들고, 스트레칭도 하고, 클라이밍도 하고, 드레스도 만드는데, '내 삶은 언제 시작될까?'라고 자문한다. 저렇게 부지런히 하루를 보내는데도, 라푼젤은 자신의 삶이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고 여긴다. 그런데 타인의 눈으로 보면 라푼젤은 이미 자신의 삶을 살고 있다. 저것이 삶이 아니면 무엇일까. 스스로 제대로 된 삶은 시작되지 않았다고 느낄 수 있지만,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고 느껴지는 삶 또한 삶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탑 안에 갇혀있기는 하지만, 매일의 하루 안에서 그 하루를 어떻게 보낼지는 라푼젤이 스스로 정할 수 있는 부분이 분명히 존재한다. 인생이 시작되었다고 느끼든 그렇지 못하든 결국 그 시간 또한 이미 라푼젤의 삶인 것이다.
지금 나에게 회사와 글쓰기는 대척점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회사가 나를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회사에 다니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에 회사에 다니는 것이다. 회사는 라푼젤이 갇혀있는 탑과는 다르며, 회사에 다닌다고 해서 내것을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회사에 다니고 있기 때문에 나는 이런 글도 써보고, 저런 글도 써보면서 계속 시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나도 한때는 회사를 그만 두어야만 내 인생이 제대로 시작될 것이라는 환상을 가진 적이 있었다. 회사를 관두고 원하는 글쓰기를 하면서 하루를 채워야만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인생을 살 수 있을 거라고 믿었었다. 하지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은 생계걱정 없이 글을 쓸 수 있는 상태이다. 어떤 글을 쓰든 날카로운 평가에 시달리지 않고, 어떤 글을 쓰든 내 글이 돈을 벌어와 생계를 책임져주는 상황 속에서, 아무런 고민이나 불안 없이 글쓰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그 어떤 작가에게도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나는 오랫동안 허상을 잡았던 것 같다.
나는 오랫동안 회사를 그만두어야만 내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회사도 글쓰기도 내가 선택한 삶의 일부였다. 내가 아무리 내 삶이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고 여겨도, 타인의 눈에는 그저 내 삶일 뿐일 것이다. 내 삶이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고 부정하는 사람은 결국 나 자신밖에는 없는 것이다. 이건 내가 바라는 삶의 모습이 아니야 라고 아무리 부정해도 이미 내 삶인 것이다. 나는 언제쯤 내 것을 할 수 있을까 라는 고민을 하지만, 이미 나는 내것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기 것’을 한다는 건 회사를 그만두고 완전히 다른 인생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내가 스스로 선택하고 지속해나가는 일 속에서 이미 자기 것이 시작되고 있다. 누구에게 인정받거나 생계를 책임질 수 있어야만 ‘자기 것’이 되는 게 아니다. ‘자신의 것’을 한다는 건 회사를 그만두고 완전히 다른 삶에서 시작하는 게 아니라, 지금의 자리에서 내가 선택하고 지속해나가는 일 속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글쓰기가 아무리 작고 여리게 지속되고 있다 하더라도 내 글쓰기는 단단하게 쌓이고 있고, 이건 내 것이 분명하다.
지금도 퇴근을 하고 나서야 투명했던 나에게 색이 입혀지는 느낌이 들고, 퇴근을 하고 나서 쉬는 숨이야말로 제대로 쉬어지는 숨처럼 느껴진다. 주말의 나는 살아있고, 평일의 나는 일부만 살아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내가 내 직업을 좋아하지 않아서, 일에 대한 열정이 부족해서, 회사에서의 근무시간이 퇴근 후나 주말과는 다르게 괴롭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회사에서의 시간을 싫어하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 들고는 했다. 그런데 회사에서 보내는 시간 또한 내 삶이었다. 내 일상을 구성하는 것들 중에서 내 것이 아닌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애초에 회사가 내 글쓰기를 막은 적이 없는데, 왜 회사와 글쓰기를 대척점에 있는 것처럼 생각했을까. 때로는 미워하고, 싫어하고, 떠나고 싶어했던 것들마저도 결국은 내 삶의 일부였던 것이다. 나는 오랫동안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은 내 것이 아니라고 부정하며 살아왔었는데, 사실은 그 어떤 것도 내 것이 아니었던 것이 없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