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취소
자주 보는 인터넷 여행게시판에서 항공권의 가격을 낮게 파는 이벤트를 하고 있다고 했다. 일본 도쿄 항공권을 저렴하게 판매 중이라며, 10만원대로 도쿄 왕복 항공권을 살 수 있다고 했다. 이 정도의 가격이면 그냥 다녀오는 것이 이득이라고, 일정도 주말을 낀 일정이라 우선 끊어놓고 다녀오면 된다고 했다. 왕복 10만원에 끊었다는 사람들도 있고, 이 정도 금액이면 다녀오는 것이 이득이라며 항공권 득템에 성공했다는 후기 글이 올라왔다. 나도 그 대열에 합류하여 몇 달 후에 주말을 낀 일정으로 도쿄 항공권을 예매했다. 평소의 도쿄행 왕복 항공권보다 저렴한 왕복 16만원에 도쿄행 항공권을 끊었다.
도쿄에는 여러번 다녀왔었다. 나는 가끔 예술병이 올라올 때가 있는데, 인기 많은 전시에 가려니 평일에도 입장하기 위한 웨이팅이 있다는 소식에 피로감이 몰려올 때 도쿄에 가서 전시회를 여유 있게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고는 한다. 일본의 버블경제 시기에 해외의 인상파 및 근대미술 작품을 활발히 매입하면서, 유럽까지 가지 않아도 유명한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을 도쿄에서 볼 수 있게 되었다. 도쿄는 언제 가더라도 관람을 할 수 있는 미술전시가 많아서, 늘 만족스러웠다.
그래서 도쿄의 항공권이 저렴하게 풀렸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 또한 그 행렬에 동참하여 도쿄행 항공권 티켓을 발권한 것이다. 도쿄에 갈 때마다 확실한 만족감을 얻고는 했다. 크게 실망할 일도 없고, 항상 다양한 미술 전시를 보며 기분전환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언제나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마음의 걸림이 있었다. 왜냐하면 지금 내 마음속에서 가장 가고 싶은 여행지가 따로 있기 때문인데, 그곳은 바로 뉴욕이다. 나는 요즘 뉴욕에 가보고 싶다. 뉴욕에 가면 몇 걸음을 걸을 때마다 유명한 것을 발견해서 발걸음을 멈추게 된다고 한다. 뉴욕에도 미술관이 많은 데다가 박물관이나 관광명소도 워낙에 많아서 볼거리가 많을 것 같다. 도쿄에 비해서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도 만날 수 있고, 완전히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도쿄라고 해서 쉽게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장소는 아니지만, 그래도 상대적으로 뉴욕보다는 가까우니까 쉽게 오갈 수 있는 곳처럼 느껴지는데 앞으로 살면서 도쿄는 몇 번쯤 더 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뉴욕은 앞으로 살면서 못 갈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도쿄에 간다고 해도 연차휴가를 써야 하고, 여행비용에 대한 지출도 클 텐데 저렴한 항공권을 끊은 김에 다녀와야지라고 하기에는 뭔가 아쉽다. 저렴하게 구입하긴 했지만, 그래도 비일상적인 지출이고, 여행을 가게 되면 아마 평소보다는 많은 돈을 쓰게 될 것이다. 꼭 보고 싶은 전시가 있어서도 아니고 이번처럼 항공권이 저렴하다고 해서 간다면 예전에 도쿄에 갔을 때만큼은 감동받지 못할 것 같다. 물론 어떤 여행은 자극 없이 그냥 생활처럼 다녀올 수도 있겠지만, 저렴한 항공권 끊은 김에 가는 것은 이 여행에 최선을 다할 준비가 안된 것처럼 느껴진다. 여행을 좀 더 간절히 원할 때 소중하게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불혹의 나이인데, 앞으로 해외여행을 얼마나 더 갈 수 있을까. 매년 휴가일수도 정해져 있고, 불혹의 나이에 접어드니 노후대비를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점이 되었다. 앞으로 내가 벌 수 있는 소득은 한계가 있는 데다가 이제 내 수명도 장담할 수 없게 되었다. 40대에 접어드니 예산과 시간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이전보다 기회비용이 크게 느껴지는데, 30대에는 지금의 지출이 투자를 위한 시드머니 생성을 지연시킨다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지금의 지출이 내 노후생활을 위협하는 느낌이다. 갈수록 기회비용이 크게 느껴진다. 30대 때에는 지금이 아니어도 나중에 언젠가 하면 되겠지 라는 생각으로 원하는 것을 나중으로 미룰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 그런데 40대가 되니 지금이 아니면 못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30대에는 나중이 되면 돈도 더 많아지고 여유도 생기고 상황이 나아지겠지 하는 희망이 있었는데, 40대에 접어들면서 '여기까지 인가 보구나. 가진 것에 감사하자.' 라는 생각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회사일이 힘들 때 은퇴를 꿈꾸고는 했었다. 은퇴하면 시간과 예산에 쫓기는 2박 3일짜리, 3박 4일짜리 여행이 아니라 천천히 이동하는 장기여행을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몇 개의 국가를 천천히 국경을 넘기도 하고, 기차로 장거리 이동을 하기도 하고, 한 도시에서 최소 3일 이상 머무르면서 어쩌면 한 달 정도 여행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나는 내 또래들이라면 가봤을 대학생 때의 배낭여행을 가보지 못했다. 과거에는 유럽대륙을 배낭 하나만 메고 시계방향으로 돈다던지 반시계방향으로 돈다던지 해서 방학 때 한 달 동안 유럽에 가서 열개 국가 이상도 돌아보면서 하는 그런 여행을 많이 가고는 했는데, 나는 그런 여행을 해보지 못했다. 대신 짧게 중국이나 일본에 갔다. 두 국가에 아쉬움이 남는다기보다는 유럽이나 미국, 호주에 가보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있다. 대학생 때 시간 많을 때 좀 더 멀리 가봤어야 하는데, 중국이나 일본은 직장인이 되어서도 갈 수 있었는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런데 은퇴를 하면 장기여행을 갈 수 있을까. 직장생활을 앞으로 몇 년 더 할 수 있을까. 나는 아시아 대륙 외에도 유럽도, 호주도, 미국도 가보고 싶은데 은퇴를 하면 장거리 여행은 경제적인 제약으로 더 어려워질 것 같다. 은퇴를 하고 나서는 시간적인 여유는 생기더라도 돈을 아껴야 한다는 압박감은 더욱 커질 것이다. 은퇴 기념으로 한두 번은 먼 곳으로 여행을 다녀올 수는 있겠지만, 그다음부터의 여행은 경제적인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은퇴 후 소득이 제한된 상태에서의 여행은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은퇴 후에 여행하는 것은 지금의 내가 은퇴자금을 얼마나 모아놓는지에 따라 달려있는데, 지금 생활도 빠듯하기 때문에 은퇴준비는 아직 요원하다. 그리고 은퇴 후에는 소득이 제한되어 있어 돈을 아끼며 살아가야 할 것이기 때문에 나는 더 이상 오랫동안 꿈꿔왔던 뉴욕여행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쿄에 가서도 즐겁겠지만, 뉴욕에 가면 그동안 접하지 못했던 새로운 것들을 접하면서 내 인식의 세계가 확장될 것 같다. 그동안 뉴욕에 가지 못했던 이유는 일정을 길게 뺄 수 없고 돈이 많이 들기 때문이었다. 뉴욕은 비행기표도 비싸고 숙박도 비싸고, 현지 물가도 너무 비싸다고 들어서 나중에 돈 많이 벌면 가야지 하고 남겨두었다. 그런데 불혹이 되니 갑자기 돈을 많이 벌게 될 것 같지도 않다. 운이 좋게 소득이 늘어날 수는 있겠지만 지금보다 압도적으로 소득이 증가하여 다른 삶이 될 것 같지는 않다. 이런 상황에서 도쿄여행에 연차를 쓰고 돈을 쓰고 여행을 가고 싶다는 마음을 써버리면 도쿄여행만큼의 익숙하고 확실한 만족감은 얻겠지만, 뉴욕여행과는 점점 더 멀어질 것 같다. 뉴욕여행에 대한 예산과 휴가일과 여행에 대한 간절함을 도쿄여행에 나눠 쓰면 뉴욕여행이 점점 더 멀어질 것이다. 도쿄여행에 간다고 해도 뉴욕여행을 하고 싶은 이 마음은 작아질 것 같지가 않다. 뉴욕여행이 더 멀어지더라도 선명하게 남아있을 것 같아서, 나중에 뉴욕여행을 갔어야 했는데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아서 이번에는 뉴욕여행에 무게를 싣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결국 도쿄행 항공권을 취소했다. 막상 취소하고 나니 저렴하게 구입한 항공권이 아깝기도 하다. 괜히 취소했나 싶은 마음에 또다시 항공권을 검색하기도 했는데, 역시 나는 익숙하게 해낼 수 있는 일보다는 낯설고 새로운 일에 도전해보고 싶다. 잘못되면 책임져야 하는 직장일도 아니고 내 돈 쓰고 여행 가는 것인데, 얼마든지 낯설고 새로운 일에 도전해도 되는 것이 아닐까. 나는 시간, 체력, 예산이라는 유한한 자원의 가치를 내가 원하는 곳에 쓰고 싶다. 도쿄에 가면 도쿄역 앞의 숙소에 묵고, 라멘을 먹고, 편의점에 가서 아이스크림을 사 먹는 익숙한 여행 대신 전혀 낯선 뉴욕에 가서 영어를 사용해 보고, 초기화되고, 멘붕이 되고, 우당탕탕 하는 경험을 해보고 싶다. 뉴욕에 가면 팁문화가 무시무시하다던데 그런 것도 경험해 보고 하나에 만원 넘는 베이글도 사 먹어보고, 식상하지만 가도 아무것도 볼 것이 없다는 자유의 여신상 발가락을 가까이 가서 보고 싶다. 뉴욕은 랜드마크가 너무 많아서 몇 걸음을 갈 때마다 멈춰서 넋을 놓고 구경하게 된다고 하는데 그 순간이 너무 기대된다.
뉴욕 여행을 알아본 적이 있는데, 여행비용도 많이 들고 일정도 길게 잡아야 해서 직장인이 가기에는 큰 도전이 될 것 같다. 매월 카드할부인생이라 웬만한 일은 그냥 카드 긁고 수습하자 주의이지만, 뉴욕여행만큼은 카드 긁고 수습할 수가 없을 것이라서 나는 아마 미리 돈도 모아놓고, 준비도 많이 해야 할 것 같다. 뉴욕여행이라는 큰 과업을 하기 위해 당분간 다른 여행은 가지 않을 것이고, 다녀와서도 한동안은 카드값에 휘청이겠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이렇게 해볼 것이다. 큰 부담 없이 확실하고 가능한 선택지보다 내 마음이 향하는 곳으로 한번 가봐야겠다. 지금이 아니면 못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