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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포 Dec 14. 2022

견월망지(見月忘指)

나는, 이동희

  옛날에, 노인들의 설화에 진실을 묻지 않았던 시절에, 한 승려가 있었다. 어느 밤, 칠흑같이 어두운 밤 밝은 달이 너무나 모순적이던 밤에, 행인이 승려를 찾아왔다. 스님, 가르침을 구하고자 왔습니다. 흔한 인사말 한 마디 없이 행인이 입을 열었다. 다소 무례한 모습에도 승려는 웃으며 답했다. 기왕 달이 예쁜 밤인데, 달이라도 보는 게 어떻겠나. 하고 승려의 손은 달을 가리켰다. 행인은 묵묵히 승려만을 바라보았다. 승려는 달을 보며 입을 열었다. 달을 보라는 짧은 말의 본질도 이해 못 하고 나만 보는데, 내가 무슨 경전을 읊든, 그대에게 닿겠는가. 행인은 비로소 깨달음을 얻고, 자리를 떠났다.


  나에게 이불은 아침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구태여 눈을 떠서 햇빛을 확인하지 않아도, 이불의 작은 무게는 깨어났음을 알려줍니다. 혹자는 시끄러운 알람이 아침을 가져다준다고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알람으로 일어난 잠은 각성입니다. 피곤한데 더 자지 못하는, 억지로 의식을 가져오는 각성입니다. 반면에 피로를 다 떨치고 일어난 진정한 기상은 이불로 시작됩니다. 눈을 떠야 할 이유도 없이, 부드럽게 다가온 아침과 부드러운 이불 이게 나의 아침입니다. 또, 이불을 걷어내고 침대에서 나와야 무언가를 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누워만 있다면 시작이라는 단어와 어울리지 않으니까요.


  그래요 이불에서 벗어나야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억지로 이불을 머리 위로 당겼습니다. 혹여 눈을 뜨더라도 아니 눈을 감고 있어도 들어오는 햇빛에 아침을 확인하지 못하게 눈을 가렸습니다. 이불이 무거워서가 아닙니다. 이불이 무겁길, 무거워서 하루 종일 누워 있어도 괜찮길 바랐습니다. 나는 종일 우울해하다가, 나는 종일 슬퍼하다가, 나는 종일 후회했습니다. 억지로 청한 잠으로 시간을 보내고, 허한 마음으로 울면서 시간을 보내고, 멍하니 생각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런 나에게 하루를 살았다는 표현은 너무 과분합니다. 산다는 것은 스스로를 받쳐 결과를 이룬 자들에게 수여되어야 합니다. 나는 하루를 보냈습니다. 나를 떠나는 시간을 잡을 생각조차 안 하고, 지켜만 보면서 하루를 보냈습니다.

  군자보구 십년불만(君子報仇 十年不晩) 한때 입에 달고 살았던 말입니다. 뜻을 내 입으로 말하는 게 부끄럽습니다. '군자가 원수를 갚음에 있어서 십 년이 걸려도 늦지 않다'라는 조금 우스운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문장을 입으로 말하며 귀로 들었고, 귀로 들으며 가슴에 새겼습니다. 내가 군자라는 것은 아닙니다. 더군다나 원수도 없습니다. 다만, 조금 다르게 해석할 뿐입니다. 원수를 '꿈'으로 바꾸어, '진정 바라는 꿈이 있다면, 몇 년이 걸리든 의미는 훼손되지 않는다.'로 받아들였습니다. 어쩌면 최면이었습니다. "이건 진정 바라는 거야. 실패해도 괜찮아. 다음에 도전하면 되지."라고 불안해하던 나를 안심시키는 도구였던 겁니다. 아! 그러나 최면은 너무 쉽게 깨져버렸습니다.


'원하는결과를얻지못했어최선을다했나실패를결국말해야해응원해준사람들을볼면목이없어다시할용기도없어 나는 또 실패하고 말 거야.' 이불 속의 태아처럼 웅크려 같은 설움을 반복했습니다. 세상을 마주하기가 너무 두려워 어둠 속에서 숨어있었지만, 나에게 따뜻함을 전해줄 사람은 없었습니다. 어머니 뱃속의 온기가 아닌, 차갑게 식은 이불의 한기만이 있었습니다. 이제는 나를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게 꿈이 맞았나? 꿈이라 해놓고 이상을 좇는 게 아닌 허상을 품고 살아온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인가? 끝없는 물음이 답변을 구했지만, 어느 하나 명쾌하게 답하지 못했습니다. 이상이라기에는 위로를 얻었던 문장을 부정하는 것이고, 허상이라기에는 허상을 이상이라 착각하며 살아온 과거의 내가 부정 당하는 것 같았습니다. 결국 나는 나를 지키기 위해 또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해가 졌습니다. 이제는 이불을 걷어내도 됩니다. 나를 괴롭히던 햇빛은 자리를 떠났고, 재잘거리던 가족의 대화도 내일을 기약하며 헤어졌습니다. 그토록 바라던 밤이 왔지만, 이유 없는 공허함을 느낍니다. 오늘이 어제와 다를 바 없었듯, 내일이 오늘과 다르지 않을 거란 예견된 미래만 남았습니다. 이래서는 잠에 들기 힘듭니다. 어떻게든 감정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일정량의 알코올이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취기가 돌면, 사사로운 잡념은 떠나갈 거고, 오롯이 나만 느끼며 잠에 들 수 있을 겁니다. 비록 방에는 술이 없어 이불에서 나가야 합니다. 괜찮습니다. 밤의 거리에는 가로등만 남아 있습니다. 가로등은 태양의 모조품이지만 결코 태양과 닮았다 못하는 가여운 이들입니다. 나는 그들에게 일종의 동질감을 느낍니다.


 밤은 제법 쌀쌀했습니다. 해의 온기를 달의 냉기가 다 쫓아내는 계절이었습니다. 오랜만의 외출에 기온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나왔습니다. 얇은 외투는 찬 바람을 막지 못했고, 서늘한 공기는 등줄기를 타고 올라와 목뒤에 한기를 불어 넣었습니다. 이런 추위에는, 어깨를 모으고 고개를 푹 꺾어 거북처럼 온기를 보존하는 게 상책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나는 당당하고 싶었나 봅니다. 아무도 나를 볼 이가 없기에, 아무도 나에게 뭐라 할 이가 없기에, 주위에는 나의 친구들인 가로등만 있기에 자신을 내었습니다. 어깨를 펴고, 고개를 쳐들고 이불 속에서 여태 못 내쉰 숨을 몰아쉬었습니다. 숨결은 하얀 김이 되어 가슴속에 담아두었던 말들을 대변하는 듯했습니다.


 폐에도 밤이 가득해졌을 때쯤, 눈에 달이 들어왔습니다. 밤이 어두워 달이 밝아 보이는 것인지, 달이 밝아 밤이 어두워 보이는 것인지, 무엇이 선행하는 것인지 헷갈릴 정도로 너무 밝은 달이 있었습니다. 그제야 나는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이상도, 허상도 아니란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손가락이었습니다. 내가 바라던 것을 가리키는 손가락이었습니다. 내가 가졌던 혼동은 너무 당연했습니다. 달이 아니었기에 예상치 못한 눈물이 있었고, 달은 아니었지만 달을 가리킨 손가락이기에 결국 달로 향하는 길이었던 겁니다. 그랬구나 그랬구나 하며 웃었습니다. 발을 돌리고 방에는 빈손으로 들어왔습니다. 방에는 따뜻한 휴식처인 이불이 있었습니다. 따스한 이불은 차가운 내 몸을 녹였고, 나는 온기에 취해 잠에 들었습니다. 꿈속에서 나는 그토록 바라던 달에 발자국을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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