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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부탁을 위한 작은 부탁 - 문간에 발 들여놓기

부탁은 우리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죠. 부탁을 잘하는 것만으로도 우리 삶은 좀 더 풍요로워지고 효율적인 시간들로 채워질 수 있습니다. 학교 조 발표 과제에서 내가 자신 없는 발표 부분을 다른 학생에게 부탁해 볼 수도 있습니다. 회사에서 보고서 작성에 필요한 자료 수집을 유관부서 담당자에게 부탁해 볼 수도 있습니다. 또한 사랑하는 8살짜리 아들이 밤 9시 전에는 꼭 침대로 갈 수 있도록 부탁해야 하는 경우도 생기지요. 이 모든 부탁들이 제대로 성공하기만 한다면 나의 시간과 노력을 그만큼 절약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부탁을 잘하기란 쉽지 않지요. 부탁을 하는 나와 부탁을 들어주는 상대방 사이의 미묘한 마음이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부탁하는 사람은 왠지 미안하고 부탁을 들어주는 사람은 왠지 거절하고 싶은 욕구를 느끼기도 합니다. 부탁을 잘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요? 앞서 소개했던 이론들 외에 마지막으로 ‘문간에 발 들여놓기 효과(foot-in-the-door technique)’를 소개해 드립니다. 쉽게 말하면 ‘큰 부탁을 하기 전에 작은 부탁을 먼저 하라’입니다.


다음은 심리학자 조너선 프리드만(Jonathan Freedman)과 스콧 프레이저(Scott Fraser)가 실제로 수행한 실험 결과입니다.


한 심리 연구가 캘리포니아에서 시행되었습니다. 연구 방식은 간단했습니다. 가정집을 2개 집단으로 나누고 동일한 부탁을 합니다. 부탁의 내용은 ‘Drive carefully’라고 쓰인 커다란 광고판을 응답자의 앞마당에 설치해 달라는 것입니다. 좋은 문구이긴 하지만 누가 자기 집 앞마당에 커다란 광고판을 설치하는 것을 달가워하겠어요. 여간 부담되는 일이 아닐 수 없죠. 예상대로 부탁받은 사람의 22%만이 승낙했습니다. 이번엔 또 다른 그룹에게 동일한 부탁을 합니다. 그런데 이 그룹은 이전 그룹과 다른 차이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바로 요 며칠 전 비슷한 다른 작은 부탁에 대해서 승낙했던 집들이 었던 것입니다. 그 작은 부탁은 ‘Be a safe driver’라고 적혀 있는 작은 스티커를 현관문에 붙이는 것이었죠. 자기 집 앞마당에 대형 광고판을 설치해 달라(큰 부탁)는 것에 비하면 깜찍하고 귀여운 부탁이죠. 이 작은 부탁을 들어줬던 사람들에게 이번에는 큰 부탁, 즉 자기 집 앞마당에 ‘광고판을 세워 줄 수 있겠냐’고 물어봅니다. 이때 큰 부탁을 들어준 사람들의 비율은 무려 52%였습니다. 작은 부탁 없이 바로 큰 부탁을 요청해서 승낙한 사람들이 비율이 22%인 점을 감안하면 두 배 이상의 수치이죠.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 살펴볼 만한 한 가지 시사점이 있습니다. 바로 큰 부탁을 하기 전 작은 부탁을 먼저 하라는 것입니다. 작은 부탁을 들어주었던 사람들은 왜 큰 부탁도 상대적으로 더 쉽게 잘 들어주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의 사고와 행동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기 때문입니다. Be a safe driver 스티커를 현관문에 붙이는 것 자체는 큰일이 아닙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애교로 봐줄 만한 부탁이죠. 크기도 크지 않거니와 스티커 하나 붙이는 데는 0.5초도 안 걸립니다. 더욱이 내용도 안전 운전과 관련된 내용이라 나쁘지 않습니다. 즉, 평소에 안전 운전에 대한 강한 신념이 있어서 그러한 스티커를 붙인 것은 아닐 것이란 얘기지요. 그냥 별거 아니라는 생각이 드니까 해 준 것입니다. 그런데 이후에 커다란 광고판을 자기 집 앞마당에 설치해 달라는 부탁을 받습니다. 고민에 빠집니다. ‘응? 근데 이건 너무 큰데. 우리 집 정원 미관상 좋지도 않을 것 같고. 그런데 안전 운전에 대한 광고판이잖아. 나는 안전 운전에 대해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지. 얼마 전에 안전 운전 스티커도 현관문에 붙였고 말이지. 그래, 안전 운전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로서는 마당에 광고판 설치를 하는 것이 맞는 것 같아.’


어떤 가요? 흥미롭지 않은 가요? 행동을 먼저 하고 그 행동에 따라서 내 태도를 결정하게 되는 경우입니다. 얼마 전 저는 회사에서 한 강사의 강의를 들었습니다. 미래의 트렌드가 주제인 강의였습니다. 그 강사는 강연 중 자신의 사례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얼마 전에 TV를 보다가 한 연예인이 입고 나온 옷을 봤어요. 『Save animal』이라는 문구가 적힌 하얀색 티셔츠였죠. 너무나 깔끔하고 예뻐 보였어요. 요즘에는 그렇게 문구가 적힌 티셔츠가 유행인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냉큼 그 셔츠를 찾아 주문했습니다. 이유는 단순했어요. 그냥 그 티셔츠가 너무 예뻐 보였어요. 며칠 뒤 그 셔츠가 도착했고 저는 기다렸다는 듯이 입고 밖을 돌아다녔죠. 그런데 신기하게도 사람들의 반응이 일관되었습니다. 셔츠가 예쁘다며 한 마디씩 꼭 물어보는 말이 있었어요. “근데, 너 동물 보호 주의자야?” 처음에는 아니라고 하며 웃어넘겼습니다. 그런데 계속 그런 질문들을 받으니 저도 모르게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어머, 나 동물 보호주의자 맞나 봐.’


행동이 사고를 결정한 전형적인 사례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무심결에 자기가 한 행동을 보고 그 행동에 맞추어 사고를 변화시키는 경우가 있습니다. 행동이 먼저 형성되고 태도가 나중에 형성되는 현상을 설명하는 심리학 이론이 있습니다. 바로 자기 지각 이론(Self-Perception theory)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계단을 힘겹게 걸어 올라온 남자에게 평소 알고 지내던 한 여성이 짠하고 나타납니다. 그 남자는 힘겹게 10개 층을 올라온 상태라 아직까지 심장이 뛰고 숨이 가쁜 상태입니다. 그 상태로 남성과 여성은 몇 분간 가벼운 대화를 이어 나갑니다. 그러다 여성이 기습적으로 질문합니다. “얼굴이 빨개져 있네요. 저 좋아하시나 봐요?” 사실 남자의 얼굴이 상기된 것은 방금 계단을 올라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남자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런가? 진짜 얼굴이 좀 빨개진 것 같기도 하고, 심장도 좀 뛰는 것 같고… 내가 정말 이 여자에게 관심이 있나?’


사랑하는 연인끼리 여행을 갑니다. 이때 남자 친구가 꼭 하는 얘기가 있죠. ‘손만 꼭 잡고 잘게.’ 어쩌면 남자들은 ‘문간에 발 들여놓기’ 기법을 이미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반대로 ‘그래, 손만 내어 주자.’라고 생각하는 여성분들이 계시다면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다이어트를 하는 제가 저 자신에게 하는 부탁이 있습니다. ‘이거 딱 한 입만 더 먹게 해 주면 안 될까? 이거 딱 하나만!’ 다이어트를 성공적으로 이끌고 싶다면 반드시 그 부탁을 거절해야 합니다. 그 한 입의 부탁을 들어주는 순간 한 입이 두 입이 되고 두 입이 세 입이 될 게 뻔하니까요. 그렇게 되면 다이어트는 다음 생(生)에서 다시 도전해야 합니다.


이처럼 문간에 발 들여놓기는 실생활 속에서 많이 활용할 수 있는 이론입니다. 상대방의 마음을 얻기 위해 써먹을 수도 있고 나 자신의 마음을 다잡기 위해 써먹을 수도 있지요.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말이 있잖아요?. 저는 천 리 길에게도 마음이 있다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천 리 길이 한 걸음을 허락하는 순간 천리길은 제게 저 끝까지의 모든 길을 내어 줄 수 있죠.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나요? 이루고 싶은 꿈이 있나요? 그럼 일단 그 목표와 꿈에 발을 들여놓으세요. 어려워 보이지만 일단 발을 들여놓으세요. 그 꿈과 목표가 당신이 발을 들여놓는 것을 허락하는 순간, 당신은 그 꿈과 목표의 더 깊숙한 곳으로 전진해 들어갈 수 있습니다.


만약 당신이 먼 길을 떠나고 싶다면 일단 가까운 길에 허락을 구하시고요.

만약 당신이 큰 꿈을 이루고 싶다면 작은 꿈들에 허락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만약 큰 신뢰를 얻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작은 신뢰부터 청하고, 큰 사랑을 얻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작은 사랑부터 부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일단은 문간에 발을 들여놓으시기 바랍니다. 작은 부탁이 큰 부탁이 되고 작은 걸음이 큰 걸음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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