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와 달의 캠핑카

ITX-청춘, 물놀이, 캠핑

by 소기


다음 중 여행 전 가장 먼저 해야 하는 말은? ( )


1) 여보, 우리 어디 갈까?

2) 너무 멀지 않은 곳이 좋겠지? 두 시간 내에 갈 수 있는.

3) 전주 어때? 이것저것 맛있는 것도 먹고, 한옥에서 자고. 부산 다시 가는 건? 지난번에 너무 좋았는데, 짧아서 좀 아쉬웠어.

4) 캠핑은 어때?

5) 아들, 어디 가 보고 싶은 데 없어?


정답: 5) 아들, 어디 가 보고 싶은 데 없어?

(해설) 아빠, 나 ITX-청춘 타고 싶어. (끝)






ITX-청춘이 멈추는 곳

목적지를 정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녀석은 언제나 답을 가지고 있어요. '글쎄, 잘 모르겠는데, 아무거나' 따위의 대답은 단 한 번도 없었어요. '간장 목살구이랑 상추쌈 먹고 싶어', '샌드위치. 블루베리잼, 치즈 빼고. 햄은 넣어야지' 하는 식이에요. 단호하고 구체적입니다. 이번 여행의 목적지를 정할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괌? 거기가 어딘데? 기차 타고 갈 수 있어? 비행기? 비행기 타기 싫어하는 거 알잖아?"

"전주? 멀어, 안 멀어? 두 시간? 오래 차 타는 거 싫어하는 거 알잖아?"

"아빠, 나 ITX-청춘 타고 싶어. 그리고 물놀이 하고 싶어. 캠핑도 하고 싶고."


소통하기 꽤 편한 편입니다(더 좋은 곳에 데려가지 못해 아쉬울 뿐).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지 명확해집니다. ITX-청춘(Intercity Train eXpress-靑春)경춘선에서 운행하는 한국철도공사의 도시 간 좌석 급행열차입니(위키백과의 설명). 그럼 경춘선에서 물놀이와 캠핑을 할 수 있는 곳을 고르면 되겠지요. 아주 간단합니다.




펜션 아니고 풀빌라

가평에 가기로 했습니다. 펜션을 알아보다 소원이라는 물놀이 실컷 하라고 풀빌라를 예약했습니다. "가평에 있는 펜션 놀러 가신다면서요? 이현이가 엄청 자랑하더라고요." 유치원 선생님 말씀을 듣고, 펜션과 풀빌라의 차이점에 대해 아이에게 자세히 일러주었습니다. "우리가 갈 곳은 풀빌라야, 풀빌라. 알겠지? 다시 말씀 드려어." 다른 뜻이 있다기보다는, 사실이 아닌 것은 즉시 바로잡아야 직성이 풀리는 타입일 뿐입니다.


아내와 아이는 ITX-청춘을 타고 저는 차를 타고, 가평역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그게 뭐하는 짓이냐 생각하실 수 있겠지만, 아이가 있는 집에서는 꽤 흔히 있는 일입니다. 물놀이 장비(애 튜브, 엄마 튜브, 물총 세 개, 물총 방패, 비치볼, 수영복 여러 벌, 수건, 아쿠아슈즈, 모자, 맥주), 캠핑(카에 필요한) 장비(캠핑 의자 세 개, 캠핑 매트, 코펠, 버너, 모기향, 벌레 퇴치제, 벌레 퇴치 팔찌, 아이스박스, 라면, 햇반, 맥주), 기타 삼일 동안 필요한 짐(옷, 옷, 옷, 세면도구, 먹을 것 잔뜩, 야구 배트.글러브.공, 부루마블, 할리갈리, 책들, 그리고 맥주)을 차에 실었습니다. 그리곤 잠시, 차를 바꿔야 하지 않겠냐고 아내에게 말해볼까 하다가 그만두었습니다.




여행의 시작: 어디 갈까,부터 이미 시작




아직도 이름을 모르겠는, 거기

여우가 달에서 어쩌고 하는 이름이었는데,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검색을 하고 예약을 하고 내비를 보며 찾아가서 하루를 묵었다 왔는데도 말입니다. 생각해 보면 단 한 번도 이름을 제대로 불렀던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 뭐였지... 여우와 달 거기 말야." 하는 식이었습니다. 아, 답답해. 검색을 해 보아야겠습니다. '여우가 달을 사랑할 때(경기도 가평군 가평읍 두밀리 593-2)'였군요!


가격은 극성수기였던 점을 감안하면 그렇게 비싼 편은 아닌 것 같습니다. 산꼭대기에 있어서 경치가 좋았습니다. 숙소는 풀빌라, 펜션, 글램핑 세 종류였습니다. 야외 수영장이 두 개나 있어서 굳이 풀빌라를 잡지 않아도 괜찮겠다 싶긴 했습니다만, 아이와 함께 야외 수영장을 구경하던 중 갑자기 웬 놈이 나타나 아이 얼굴에 (것도 바로 코 앞에서) 물총을 쏘고 도망치는 (이 쉐키를 확 마) 사건을 겪고 나서는, 풀빌라 잡기를 잘했다 생각했습니다. 전체적으로 시설물들이 깔끔하게 관리가 잘 된 느낌이었습니다.


풀빌라는 3층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1층이 풀과 스파 욕조, 2층이 거실과 주방, 3층이 침실이었습니다. 처음 숙소에 들어서면 히야아~ 하며 구경을 하는 게 맛이지요. 여기는 확실히 그런 맛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계단을 계속 오르내려야 하는 것이 좀 불편하긴 했습니다. 물놀이를 그렇게 오래 하지는 않았습니다(녀석이 그럼 그렇지). 아이들이 놀기에는 물이 깊어서(제 허리 약간 위 정도, 제 키가 2미터 정도니까... 흠,흠) 물총 놀이(저는 풀에서 물총 공격을 '일방적으로' 받고 아이는 스파 욕조에서 공격을 하는 방식)를 잠깐 하다 욕조에 오래 앉아 있었습니다. 아이와 함께 따뜻한 물속에서 고즈넉이 '야구 응원가'를 듣고 있으니, 뭐 그것도 나름 재밌었습니다. 아이가 잠들고 나서는 욕조에 앉아 튜브가 풀에 둥둥 떠다니는 걸 구경하며 백예린과 H.E.R.(Gabi Wilson) 들었습니다. 둘 다 무언가 '일렁이는' 분위기여서 그곳의 그때와 잘 어울렸습니다.




'여우가 달을 사랑할 때' 전경 (사진 출처: www.foxlove.kr)




캠핑의 이유

다음 날 캠핑장에 갔습니다. 캠핑은 도저히 자신 없어 캠핑카를 빌려 두었습니다. '아프리카예술박물관(경기도 포천시 소흘읍 무림리 42)'이라는 곳에 갔습니다. 아프리카예술박물관은 이름 그대로 아프리카 문화.예술을 전시해 둔 박물관뿐만 아니라, 관련 체험학교, 직접 먹이를 줄 수 있는 동물원, 그리고 캠핑장을 갖추고 있다고 (홈페이지에서 자랑을) 했습니다. 실상은, 물론 거짓말을 한 것은 없지만 그렇게까지 자랑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박물관의 전시품은 많았으나 전시라기보다는 '보관' 정도로 보였습니다. 체험은 주말에만 할 수 있었고요(저희는 못했다는 이야기). 동물원은 새와 원숭이, 토끼, 미어캣, 그리고 이름이 잘 기억나지 않는 몇 종의 동물들을 그냥 기르는 곳 같았습니다. 전반적으로, 충분히 괜찮은 콘텐츠를 가졌는데 활용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꽤 재밌지만, 더 재밌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좀 아쉽다 정도,라고나 할까요.


그리고 문제의 캠핑. 저는 캠핑을 싫어합니다. 이번에 캠핑카에 있으면서 다시 한번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를 두 가지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1. 익숙하지 않습니다. 살던 곳과 너무 다릅니다. 문을 열면 질퍽한 땅(비까지 주룩주룩)이 있고 숲이 있고, 벌레가 겁나 많습니다. 화장실을 가는데도 30미터 정도는 걸어야 합니다. 세 식구가 한 평 남짓한 공간에서 종일 붙어 있어야 합니다. 비가 오면 비가 오는지 벌레가 울면 벌레가 우는지 바로 알아챌 수 있습니다. 매우 신경이 쓰입니다. 비가 종일 오는구나, 벌레 우는 소리도 다 다르구나, 하면서 말입니다.

2. 커스터마이징의 끝입니다. 호텔과 같은 일반적인 형태의 숙소는 장소와 용도가 거의 정해져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것을 따르는데 아무 불만이 없기도 하고요. 자는 곳, 씻는 곳, 앉아서 창밖을 보는 곳 등. 하지만 캠핑은 모두 제각각입니다. 크기나 모양부터 그렇습니다. 도대체 저건 아무래도 너무한 것 아닌가 싶은 텐트에서부터 정말 으리으리하게 지어 놓은 궁궐 같은 텐트까지 다양합니다. 그 속에서 (혹은 밖에서도) 다들 자신들만의 공간을 만들고 씁니다. 저는 그냥, 정해져 있는 게 좋아요.


그런데 가만 보니 이 두 가지 이유는, 캠핑을 싫어하는 이유도 되지만 좋아하는 이유도 되는 것 같습니다. 어차피 여행은 일상이 아니니까, 익숙하지 않은 낯선 환경에서 (평소에는 하기 어려운) 내 맘대로 해 보는 것 말입니다. 나쁘지 않은, 사실은 꽤 근사한 일 같습니다만, 양보하겠습니다. 저는 호텔이 좋아요.




아프리카예술박물관의 여기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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