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오니 살 것 같았다. 너무 오래 갇혀 있었다. 아무도 가두지는 않았지만 그러는 편이 낫겠다 생각했다. 모두가 애쓰고 있었다. 정부가 국민이 각자의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었다(감사와 존경, 그리고 응원을). 나의 할 일은 나와 가족의 건강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집에만 있었던 게 바이러스 때문만은 아니었다. 바람직하지 않은 방향으로 몰아가는 무리가 있다 생각했다. 일부 언론이 사실보다 공포를 생산해 퍼 나르고, 정치(잘못)하는 자들이 대책보다 정쟁에만 몰두했다. 경계해야 할 것은 병인데, 그 대상이 사람으로 바뀌었다. 사람이 적이 되었다.
아이들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누군가는 (어디든) 해외여행을 다녀온 아이들을 격리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더 크게 더 날카롭게 목소리를 내는 사람은 부모들이었다. 내 아이를 위해 다른 아이를 가두어야 한다. 지역 맘 카페의 글을 보고 해외여행을 취소했다. 취소 수수료만 백만 원이 넘었지만 결정에 망설임은 없었다. 취소 수수료를 잃었다 생각하지 말고 차액을 벌었다 생각하기로 했다. 쿨한 척했고 마음이 편했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좀 아깝긴 하다.
이 난리통에 어딜 간다고?
말과는 다르게 설렜다. '어디든 가야 할 것만 같(*선우정아 '도망가자' 가사 中)'았다. 강원도에 며칠 다녀오기로 했다. 서둘러 숙소 예약을 마쳤다. 첫날은 아이를 위한 숙소, 다음날은 아내와 나를 위한 숙소였다.
잘 곳만 있다면, 어디를 가든 무얼 먹든 하든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일단 집 밖으로 나가는 것만으로도 숨통이 트였다. 여전히 마스크를 쓰고 있었으므로 사실 산이든 바다든 같은 냄새가 났다. 그럼에도 상쾌하다 생각했고, 실제 상쾌하다고 믿게 되었다.
아이는 소떡소떡이 먹고 싶어 자꾸만 오줌이 마려웠다. 휴게소에 들렀다. 나는 간단히 라면과 공깃밥을 먹었다. 실상은 밥까지 말아먹어서 그리 간단치 않은 식사였다. 그렇지만 라면 국물을, 밥을 말아먹지 않고 도대체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섭리를 따르고 더부룩함을 얻었다. 소화를 시키고 졸음도 쫓을 겸 어슬렁어슬렁 걸었다. 휴게소를 방문한 사람과 개를 구경하고, 효과가 미심쩍은 안마기를 건드려 보고, 박찬호 크림을 손목에 바르고, 캐릭터 모형과 사진을 찍고, 커피를 한 잔 사서 다시 길을 떠났다.
‘뛰뛰침대’가 있는 방이었다. 리조트 홈페이지에서 본 사진보다는 조금 더 오래돼 보였다. 이제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아이의 반응은 의외로 차분했다. 침대를 두어 번 오르락내리락하고, 매트리스 위에서 서너 번 뛰어보고는 흥미를 잃은 듯했다. 리모컨을 누르면 소리도 나고 불도 들어오고 하는데! 시끄럽다고 끄라고 했다. 아이의 관심은 창밖에 있었다. 아내와 나도 그러했으므로 기뻤다.
창밖은 바다였다. 무엇보다 ‘밖’으로 나간다는 것이, 그 밖에 바다가 있다는 것이 기뻤다. 아내와 나는 걸었고 아이는 어김없이 뛰었다. 전기 스쿠터(3인승, 30분, 2만 원)를 타고 바닷가를 달렸다. 최고 시속은 23Km였다. 바람이 차서 25분 만에 반납했다. 바다 가까이 갔다. 파도가 쓸려가면 슬금슬금 따라갔다가, 밀려오면 펄쩍 달아났다. 그 단순한 놀이를 한 시간이나 했다. 파도를 피해 달아날 때마다 비명과 웃음이 터졌다. 아이는 똑같은 상황이 스무 번 서른 번 반복되는데도 매번 끈기 있게 자지러졌다. 나는 그 똑같은 모습을 스무 번 서른 번 보면서도 내내 웃었다.
아이는 운동화가 젖었고 모래가 가득했지만, 캐치볼을 거르지 않았다. 숙소로 돌아와 저녁을 먹었다. 다시 바다로 나가 불꽃놀이를 했다. 기다란 막대 같이 생긴 것을 모래에 깊숙이 꽂아 놓고 심지 끝에 불을 붙이면! 고요했다. 파도 소리와 주변의 소음마저 심지 속으로 타 들어가 버렸나 싶을 정도로. 불발인가 하고 얼굴 근육을 슬며시 풀었더니, 속았지! 하며 갑자기 불꽃을 쏘기 시작했다. 2초 간격으로 열댓 번 정도 발사되었다. 하늘로 올라가서는 스무 갈래 정도로 퍼졌다. 불발인 척 뜸을 들인 것에 비해서는 너무 짧게 끝났지만, 충분히 눈에 담을 만했다.
아이는 뛰뛰침대 대신 옆에 있는 인디언 텐트에서 잔다고 했다. 엄마가 옆에서 자길 원해 두꺼운 이불을 모조리 깔아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내가 뛰뛰침대에서 잤다. 누울 자리가 거기밖에 없었다. 불편해도 한 곳에서 자고 싶었다. 하나 더 있는 침실(더블 배드가 있는)은 아예 쓰질 않았다. 무릎을 펼 수 없었고 움직일 때마다 삐걱거려서 자는 둥 마는 둥 했지만, 다음 날 몹시 피곤했다.
아침을 먹으며 커피를 두어 잔 마셨다. 레스토랑 통유리 창밖 역시 바다였다. 비가 왔다. 월급이 들어왔다. 비 오는 것쯤 뭐가 대수냐 생각했다.
두 번째 숙소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창밖에 강이 있고 너머에 산이 있었다. 여전히 비가 왔다. 책을 보거나 TV를 보거나 강을 보거나 산을 보거나 누워 천장을 보다가 황태구이를 먹으러 갔다. 다시 돌아와 비슷한 행동을 했다. 이따금 아이와 뛰었다. 숙소에는 우리밖에는 없는 듯했다. 집에 있는 것과 다름없이 지내긴 했지만(뛰는 것 빼고) 층간소음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어 마음이 편했다. 치킨(모든 배달 음식을 통틀어 이곳에 배달이 되는 것은 치킨 뿐이며 그마저도 단 한 집뿐)을 시켜 먹고 이것저것 보다가 뛰다가 잠이 들었다.
다음 날은 조금 늦게 일어났다. 황태탕을 먹고 집으로 돌아왔다. 오는 길에 국도에서 터널로 들어갔다. 터널을 나오니 눈에 보이는 게 온통 눈이었다. 내리는 것도 쌓인 것도 길을 둘러싼 산도 모두 눈이었다. 터널을 지나 다른 시공간으로 온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까지는 들지 않았지만, 참 예쁘다 했다. 우리가 좋은 시간에 좋은 공간을 지나고 있구나 했다. 급할 게 없었다. 느리게 돌아왔다.
덧.
식당에는 우리밖에 없었다. 주인은 TV를 보며 자주 한숨을 쉬었다. 소리를 내지는 않았고 멀찌감치 떨어져 있을 때만 그랬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금세 얼굴이 활짝 펴졌다. 금방이라도 달려올 듯 몸이 우리를 향했다. 그럴 때마다 두 손을 들어 아니라고 괜찮다고 미안하다고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아니라고 언제든 부르라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TV를 보았다.
사람이 없어 마음이 불편했다. 사람이 있어야 할 곳에 사람이 없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았다. 그러므로 자연에 사람이 포함된다. 자연의 풍경이 익숙해졌으면 좋겠다. 전처럼 평범하고 지루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