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이현입니다.
응? 아빠가 저기 뒤에서 뭐라고 하네요. 분명 입은 움직이는데 소리는 안 들려요. 가끔 아빠는 왜 저래, 싶을 때가 있어요. 이― 하고 입을 옆으로 벌려 자기 이를 보여주었다가, 아― 하고 입을 크게 벌리는 걸 계속 반복하고 있어요. 눈을 똥그랗게 뜨고요. 평소처럼 '윽 누렁니, 윽 입냄새!' 하면서 장난을 치고 싶지만, 사람들이 많아서 참기로 했어요. 제가 못 알아들으니까 아빠는 입모양을 더 크게 하고 눈을 더 크게 떴어요. 입이 커지고 눈이 커지니까 콧구멍도 같이 커져서 너무 웃겼어요. 아유 참, 시도 때도 없이 저렇게 장난을 건다니까요. 아~ 〈신서유기〉 삼촌들이 하던 그 게임을 하자는 걸까요! 그렇다면 더 이상 무시하는 것은 상대에 대한 예의가 아니죠. 저렇게 열심인데. 가만 보자......
"기차?"
아빠가 '기차라고?' 하면서 기가 찬 표정을 지었어요. 어이없다 이거죠. 자기가 설명을 잘못한 건 생각도 않고, 쳇.
"인사." 아빠가 작게 말했어요.
"응?" 당연히 못 알아들었죠.
"인사. 인사부터 하라고." 아빠가 좀 더 크게 말했어요.
"괜찮아요, 아버님. 박이현 어린이, 아 미안해요. 박이현 선수. 그냥 편하게 이야기하면 돼요. 편하게."
카메라 삼촌,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전혀 편하지 않다고요. 야구부 형들, 엄마 아빠들, 감독님, 코치님, 선생님들, 방송국에서 오신 분들, 모두 다 저만 보고 있잖아요. 또...... 카메라가 저를 찍고 있잖아요. 텔레비전에 나가는 거잖아요. 어떻게 편할 수가 있겠냐고요. 근데 자꾸 배꼽이 간질간질하면서, 실실 웃음이 나는 게...... 참 이상해요. 저는 헤헤 이럴 때면 헤헤 자꾸 웃음이 헤헤 왜 이럴까요? 헤헤.
"제 꿈은 야구 선수입니다.
저는 박이현입니다.
아 맞다, 안녕하세요. 헤헤."
어릴 때부터 야구를 좋아한 건 아니에요. 그러니까 아기 때 말이에요, 지금은 형아고. 아기 때는 아빠가 야구를 더 좋아했죠. 롯데 유니폼도 있었어요. 아빠가 입고 있는 것도 봤고요. 지금은 어디 있는지 모르겠지만요. 아빠가 야구 중계를 보면서 늘 화를 냈던 기억도 나요. 그러면서 왜 매일 보는지 모르겠지만요. 아빠랑 야구장에도 갔었...다고 들었는데, 솔직히 기억은 안 나요. 그날 민병헌 선수가 홈런을 쳤고, 그 공이 저희 바로 앞자리까지 왔었대요. 그래서 텔레비전 중계에도 나왔었대요. 아, 영상은 본 적 있어요. 자리에 앉아서 〈캐리와 장난감 친구들〉을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고 아빠도 공룡처럼 꾸에엑 소리를 지르면서 벌떡 일어나 방방 뛰더라고요. 저는 무슨 일인지 모르겠는데 그냥 덥고 시끄럽고 지루하고 그래서 계속 영상만 보고 있었죠 뭐. 집에 와서 엄마랑 아빠가 이야기하는 걸 들었는데, 아빠는 저랑 같이 야구 보고 캐치볼하고 그러는 게 꿈이었대요. "얘는 글렀어." 아빠가 웃으면서 말하니까 엄마가 "우리집에 야구 바보는 하나로 충분해." 하며 왠지 안심하는 것 같았어요.
"계기? 계기가 뭐예요? 계기? 고기? 맛있겠다. 헤헤."
음...... 야구를 왜 좋아하게 됐냐면요...... 모르겠어요. 그냥 갑자기 좋아졌어요. 야구를 보는 것도 재밌고, 선수들 유니폼도 멋지고, 응원가도 신나고. 그래도 제일 좋은 건 야구를 하는 거예요. 아빠랑 매일 야구를 했어요. 근데 웃긴 게 뭔 줄 아세요? 지금까지 한 번도 아빠가 이긴 적이 없어요. 테니스 공으로 할 때부터. 그다음 연식구로 하고, 지금은 경식구로 하는데 제가 맨날 이겨요. 홈런도 엄청 많이 쳤어요. 아빠는 맨날 삼진 아니면 땅볼이에요. 그렇게 야구를 맨날 보면서 어쩜 그래요? 엄마 말대로 진짜 야구 바보 맞나 봐요. 바아보. 크크킄.
리틀 야구단 주말반을 2년 정도 다녔어요. 1학년 때부터 갔는데, 1학년은 저밖에 없었어요. 2학년 됐을 때도 2학년은 저밖에 없긴 했지만요. 그래도 형들이랑 같이 야구하는 게 좋았어요. 저 야구부 간다고 하니까 형들이 응원도 해 줬어요. 재훈이 형은, 그 형은 5학년이었는데, 첫 안타 치면 전화하라고 했어요. 근데 전화번호를 몰라요. 크킄. 카톡에는 있어요, 그래서 괜찮아요. 감독님도 좋았어요. 캐칭, 러닝, 배팅, 피칭 다 감독님한테 배웠어요. 구속도 64까지 찍었어요. 64킬로그램이요. 아 킬로미터. 크크킄. 이제 3학년이니까 더 던질 수 있어요. 한...... 70은 넘겠죠?
"이정후 선수 좋아해요. 진짜 멋져요."
실은 그래서 51번 하고 싶었는데, 없었어요. 그래서 고르라고 주신 번호 중에 17번이 제일 맘에 들어서 17번으로 했어요. 아빠도 17번이 제일 좋다고 했어요. 오타니 선수가 17번 이래요. LA 에인절스 선수인데, 진짜 잘한대요. 홈런도 40개 넘게 치고, 160 넘게 던진대요. 처음엔 일본 사람이라 싫었거든요. 《설민석의 한국사 대모험》 보면 일본이 나쁜 짓을 많이 했잖아요. 그래서 일본을 싫어하게 됐거든요. 근데 오타니는 야구도 열심히 잘하지만 착하기도 하대요. 인사도 잘하고 쓰레기도 잘 줍고 그런대요. 훌륭한 야구 선수가 되려면 야구도 잘해야 하지만 착한 것도 중요하대요. 그래서 17번 마음에 들어요. 물론 이정후 선수가 더 좋긴 하지만요.
"메이저리그요? 물론 가면 좋겠지만...... 아니요. 가기 어려울까 봐 그런 게 아니라...... 너무 멀잖아요. 비행기도 오래 타야 하고. 제가 비행기 타는 거를 별로 안 좋아해서......"
어어? 야구부 형들이 다 나갔어요. 이제 훈련 시작인가 봐요. 저도 얼른 가야 할 것 같은데 언제까지 찍는 걸까요? 가야 할 거 같은데......
"마지막으로 궁금한 것 있어요?"
오 다행이에요. 이제 그만 찍나 봐요. 얼른 형들 따라가고 싶은데, 또 궁금한 건 참을 수가 없어요. 그럼 진짜 마지막으로,
"근데요, 제목이 왜 〈내일은 야구왕〉이에요? 내일은 힘들 거 같은데......?"
"그럼 언제가 괜찮겠어요?" 카메라 삼촌은 뭐가 그리 재밌는지 한참 웃고는 물었어요.
"내일 말고 내일모레? 크킄. 아니면...... 한 스물세 살?"
"왜 스물세 살이에요?" 또 한참 웃다가 또 물어보네요.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보래 놓고 대답은 안 해 주고 계속 물어봐요. 빨리 가야 되는데.
"세종대왕도 스물두 살에 왕이 되셨으니까, 최소한 스물세 살은 되어야 왕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세종대왕은 아빠가 왕이었는데 우리 아빠는 왕이 아니니까 일 년 정도는 더 걸릴 것 같아요."
"와 박이현 선수 역사도 잘 아네요. 그런 건 어디서 배웠어요?"
"《설민석의 한국사 대모험》."
"이현아, 가자!" 감독님이 문밖에서 부르셨어요. 쭈뼛쭈뼛 의자에서 내려가면서 카메라 삼촌을 쳐다보았어요. 카메라 삼촌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엄지 척을 해 주었어요. 가방을 챙겨 들고 야구부실 문을 열고 나가는데 카메라 삼촌이 외쳤어요.
"박이현 선수, 파이팅!"
저도 모르게 멈춰 섰어요. 또 배꼽이 간질간질했지만 웃기지는 않았어요. 대신 귀가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어요. 뒤돌아서서 모자를 벗고 고개를 숙였어요. 카메라 삼촌도 모자를 벗고 고개를 숙였어요. 앗 이제 보니 빡빡이 삼촌이었어요. 얼른 모자를 쓰고 뒤돌아 달렸어요. 복도 끝에 운동장이 보였어요. 등 뒤에서 사람들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어요.
박이현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