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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기 Jan 17. 2022

유니폼에 검정 후드 티


    야구부 첫날이에요.

 

    운동장 끝에서 감독님을 만났어요. 감독님을 처음 만난 날, 그러니까 지난번 테스트 보던 날에도 느꼈던 건데요, 감독님은 진짜 진짜 커요. 190 정도는 되시는 것 같아요. '우워어 대단쓰...' 그런 생각을 하며 서 있는데 갑자기, "인사해야지." 하며 아빠가 제 등을 슬쩍 밀었어요. 타다닥, 걸음 반 앞으로 나갔어요. 그 바람에 엄마 손을 놓쳤어요. 아빠를 한 번 째려봐 줘야 하는데 그러기엔 감독님이 너무 앞에 있었어요. 모자를 벗으며 꾸벅 감독님에게 인사를 했어요. 감독님이 웃으며 제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어요.

    엄마 아빠도 감독님에게 인사를 했어요. 아빠는 몇 번이나 고개를 숙였어요. 아빠는 확실히 인사를 잘하는 것 같아요. 인사팀장이라 그런가 봐요. 엄마는 눈을 빠르게 깜빡이더니 고개를 돌려 눈을 가렸어요. 눈이 아픈가 봐요. 찬바람이 눈에 들어갔나 봐요. 전에도 찬바람이 눈에 들어갔다고 아프다고 울었거든요. 아마 유치원 졸업식 때였던 것 같아요.

    '내가 엄마 눈을 만져주면 금방 났는데......' 생각했지만,

    야구부 형들이 기다리고 있어서 어쩔 수 없었어요. 형들은 모두 점퍼를 벗고 검정색 후드 티를 입고 서 있었어요. 저도 점퍼를 벗으려는데 감독님이 "추워어. 입어어." 하셨어요. 그래서 다시 지퍼를 목까지 올렸는데 단추를 잠그는 게 어려웠어요. 똑딱이 단추가 너무 빡빡해서 아무리 눌러도 목만 아프고 딸깍 소리가 안 났어요.

    "저, 감독님......" 용기를 냈어요.

    "응?" 감독님이 허리를 숙여 제 얼굴에 귀를 가까이 대셨어요. 감독님 얼굴이 제 얼굴까지 오는데 한참 걸리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점퍼 단추...... 다 채워야 돼요?" 말을 하면서도 계속 단추를 눌렀지만 채워지지 않았어요.

    감독님은 웃으며 제일 아래와 제일 위 단추를 채워 주시고는 "안 채워도 돼, 가 봐." 하셨어요.


    야구부 첫 훈련이 시작되었어요. 줄을 맞춰 운동장 가장자리를 천천히 달렸어요. 출발할 때는 제가 제일 끝에 있었는데 형들이 속도를 늦추면서 저를 감싸기 시작했어요. 반 바퀴를 채 돌기도 전에 저는 완전히 형들에게 둘러싸였어요. 한 바퀴를 돌아 출발점을 지나는데 엄마 아빠가 보이지 않았어요. 다시 앞을 보고 달렸어요. 커다란 등이 찬바람을 막아주었어요. 찬바람이 눈에 들어가지 않아서, 울지 않았어요.       

      

    근데 찬바람이고 뭐고 엄마고 아빠고 뭐 그런 건 아무 문제도 아니었어요. 문제는 '계속 계속 뛴다'는 거예요. 이미 다섯 바퀴도 넘게 뛴 거 같은데 또 돌고, 이제 슬슬 스트레칭이나 캐치볼을 하면 될 거 같은데 또 돌고, 영하 10도인데 땀이 날 거 같은 거 실화임 생각하는데 또 돌고, 힘들다 말은 못 하겠고 옆에 형한테 눈으로 신호를 보낼까 하고 쳐다보는데 키가 작아 형 팔뚝밖에 안 보이는데 또 돌고, 돌고 돌고 또 도는데 계속 돌다 또 돌면 어떡하지 할 때쯤 드디어 "제자리에 섯!"

    살았다―

    이제 좀 쉬겠지 했는데 곧바로 스트레칭 시작! 근데 계속 뛰는 게 문제라고 했던 거 취소할게요. 스트레칭이 진짜...... 어우 장난이 아닌 거예요. 스트레칭이 진짜 진짜 문제 문제였어요. 팔을 뒤로 요래 하고 다리를 요래 해서 하늘로 들고 요래 요래 하는 거라고 하는데, 무슨 말인지도 모르겠고 아무리 해 보려고 해도 안 되고, 형들도 자기들 하기 바빠서 저를 도와줄 생각을 못하는 것 같았어요. 진짜 그만둘까 생각까지 들었다니까요. 그야말로 지옥의 스트레칭이었어요. 그렇게 부르기로 했어요.


    캐치볼은 21번 형이랑 했어요. 4학년이었는데 덩치가 큰 형이었어요. 형은 확실히 살살 던져 주는 것 같았어요. 받기는 쉬웠지만 좀 더 세게 던져도 괜찮은데, 생각이 들었어요. 말하지는 않았지만요. 21번 형도 아무 말 없이 던지고 받고 또 던지고 그랬어요. 어쩌다 눈이 마주치면 식 웃으며 살짝 목을 움츠렸어요. 형이지만 조금 귀엽다,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말하지는 않았고요. 캐치볼이 끝나자 형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저쪽으로 달려갔어요. 잠깐 서 있다가 저도 그쪽으로 달려갔어요.


    간식으로 토스트와 주스가 나왔어요. 토스트는 먹어도 먹어도 맛있어요. 실제로 오늘 아침에 토스트를 먹었는데도 또 맛있더라고요. 저는 간식 시간을 꽉 채워서 다 먹었는데 형들은 정말 빨리 먹었어요. 거의 뭐 한 10초 만에 그냥 솩―까지는 아니고, 그래도 1분 정도 만에 다 먹는 것 같았어요. 역시 야구부가 다르긴 한가 봐요. 저는 형들 따라가려면 아직 멀었어요. 밖으로 나왔는데 형들이 저를 데리고 운동장 구석으로 갔어요. 갑자기 오줌이 살짝 마려운 기분이 들었어요. 5학년 형아가 저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말했어요.


    "이현아, 이 형은 전 주장이야."

    ......

    "이 형은 주장이고."

    ......

    "얘는 고추장이고."

    헤―

    "예는 그냥 고추야. 크크크킄."

    크크크킄.


    저도 형들처럼 점퍼를 벗었어요. 유니폼에 검정 후드 티. 이제 완전 같아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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