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느리게 흘렀어요. 아까 다섯 시였는데 지금 다섯 시 구 분이네요. 아직 한 시간 이십일 분이나 남았어요. 구 분밖에 안 지났는데 금방 어두워졌어요. 어두워서 그런가 더 춥게 느껴졌어요. 점퍼는 아직 입지 못했어요. 중간에 쉬는 시간이 있었지만 벨트를 잠그는 데 오래 걸려 바로 운동장으로 달려왔어요. 언제쯤이며 형들처럼 쉬도 잘할 수 있을까요?
어두워지자 운동장이 더 커졌어요. 한눈에 들어오지 않아서 자꾸 두리번거렸어요. 자꾸 두리번거리니까 무언가 찾고 싶어졌어요. 뭔지는 모르겠는데 찾고 있는 게 안 보이니까 울고 싶어졌어요. 엄마 아빠가 보고 싶었어요.
"이현아아아!"
훈련이 끝나고 아빠가 달려왔어요. 달려가 안기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어요. 형들은 아무도 그러지 않으니까요.
"응, 아빠." 나도 형들이 하는 대로 했어요.
그런데 아빠는 가방도 들어주고 안아주고 손도 만지고 얼굴도 부비고 했어요. 형들 엄마 아빠는 아무도 안 그러는데...... 그래도 싫지 않았어요. 아빠 손도 차가웠어요. 밖에 오래 서 있었나 봐요. 그래도 왠지 따뜻했어요.
"재밌었어?"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아빠가 물었어요.
"응, 추웠어."
"추웠지이? 아이구우, 좀 더 따뜻하게 입혔어야 했는데 아빠가......"
아빠가 내 손을 잡았어요.
"그래도 재밌었어."
나도 아빠 손을 꼭 쥐었어요.
"잘했어. 이현아, 잘했어."
잘 못했는데. 운동장 열 바퀴 돌고 쓰러질 뻔했는데, 지옥의 스트레칭은 아예 따라 하지도 못했는데, 내야 펑고는 알까기만 했는데, 외야 펑고는 그냥 공 주우러 다니기 바빴는데, 토스 배팅은 세 번밖에 못 맞혔는데......
"잘했어, 정말......"
아닌데. 쉬하고 벨트도 잘 못 잠갔는데......
이현아―
이현아, 달려―
코치님이 팔을 엄청 빠르게 돌려요. 이건 돌아야죠. 형들이 더그아웃에서 제 이름을 외치고 있어요. 돌아줘야 돼요, 이건. 3루를 돌아 홈으로 향했어요. 앞만 보고 뛰었어요. 홈이 보여요. 슬라이딩! 슬라이딩! 대기 타석에 있던 형이 슬라이딩하라고 오리처럼 꽥꽥! 아 웃으면 안 되는데... 그 순간 펑! 형이 진짜 오리로 변했어요. 오잉? 크크크킄 웃다가 넘어지고 말았어요. 첨벙! 야구장은 어느새 수영장으로 변해 있었어요. 물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데, 저기 홈이 둥둥 떠가고 있어요. 터치를 해야 하는데, 그래야 이기는데, 손이 닿질 않......
"이현아."
아빠가 내 가슴을 토닥토닥했어요. 깨우는 건지 재우는 건지 모르겠지만 암튼, 꿈이었다니 다행...... 물! 얼굴에 물이! 꿈이 아닌 걸까요? 제가 득점에 실패하고 경기가 끝나버린 걸까요?
"에구구 우리 아들, 힘들었나 보네. 차에서 절대 안 자더니...... 침까지 흘리고."
츄릅, 츄르릅. 어쨌든
집에 왔어요.
집이 좋아요.
집에 엄마가 있어요. 엄마 냄새가 나요. 킁킁거리고 찾지 않아도 엄마 품속에 파고들지 않아도, 집 어디에서든 엄마 냄새가 나요. 그래서 이 방 저 방 뒹굴 뒹굴 굴러다녀도 엄마 품속처럼 포근해요.
집은 엄마예요.
그래도 오늘은 진짜 엄마 품속이 필요해요. 엄마를 보자마자 폭 안겨 품속으로 쏙 들어갔어요. 엄마도 꼬옥 안아 주셨어요. 손부터 씻어야지, 라고도 안 하고 한참을 꼬옥.
낮에 운동장에서 엄마가 울었던 게 생각이 나 엄마 눈을 만져 보았어요. 또 눈물이 있어요.
"엄마, 눈 아직도 아파?"
"응? 괜찮아."
"근데 왜 울어?"
"이현이 보니까 좋아서."
엄마 눈에서 눈물이 더 많이 나왔어요. 엄마는 가끔 이상한 게, 울면서 웃어요. 근데 엄마가 우니까 나도 눈물이 나오려고 했어요. 하루 종일 얼어 있던 게 녹아서 나오나 봐요. 엄마 품에 얼굴을 대고 조용히, 조금 울었어요.
"이현아, 아빠가 이현이 야구부 첫날 기념으로 선물 사 왔어. 뭐어게?" 아빠는 눈치가 좀 없는 편이에요. 꼭 이렇게 분위기를 깬다고요. 그래도 성의를 봐서 "뭔데?" 하고 물었어요.
"짜잔!〈설민석의 한국사 대모험〉19권!"
"응."
"그게 다야?"
"아빠, 고마워."
"응, 이따 자기 전에 침대에서 봐. 아빠가 다리 주물러 줄게."
아빠, 실은 〈Go Go 카카오프렌즈〉가 더 갖고 싶었지만, 고마워. 라고 말하지는 않았어요. 아...... 말했나? 말했네요.
밤 열 시. 엄마랑 자려고 누웠어요.
"이현아, 야구부 재밌었어?" 엄마가 내 등을 쓰다듬으며 물었어요.
"응, 근데 좀 힘들었어."
"그랬구나...... 추웠지?"
"응, 엄청 추웠어." 말하고 나니까 또 몸이 부르르 떨렸어요. 엄마가 더 꼭 안아주었어요.
"엄마, 나......" 엄마 품이 따뜻하니까 나도 모르게 그만
"야구부 언제 그만둘 수 있어?" 말하고 말았어요. 하루 종일 참았는데, 말해 버렸어요. 바보 같이.
엄마가 내 머리를 쓰다듬고 등을 토닥토닥했어요.
"이현이 힘들면, 언제든." 토닥토닥.
"재밌어, 그래도. 재밌어, 엄마." 토닥토닥.
"응, 고마워." 토닥토닥.
"응, 나도." 토닥토닥.
"내일은 더 따뜻하게 입자." 토닥토닥.
"응, 내일은 팬티도 두 장 입을 거야." 토닥토닥.
"사랑해, 아들." 토닥토닥.
"사랑해." 토닥토닥.
토닥토닥
토닥토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