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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gongnyeon Oct 22. 2023

친절이라는 불편함

친척들은 다음날이 아닌 이틀 뒤에 떠났다. 그 사이 누나와 나는 조금 더 가까워졌다. 그들이 떠난 이후 누나는 나를 붙잡고 “아엠 프리!”라면서 행복한 표정으로 안아줬다. 도대체 게스트 이즈 골드가 뭔데 게스트가 이토록 오래 머물다 가는건가. 나도 게스트로서 할 말은 없었지만, 누나는 정말 바빴다. 아침에 눈뜨면 항상 누나는 깨어있었고 방 앞 신발이 가지런하게 정리되어있었다. 내가 일어난걸 알아채면 머지않아 우유를 데워 방으로 가져다줬다. 잘 잤냐는 따듯한 눈빛과 다정한 말을 건넸다. 영어를 잘 하지 못했지만 몇개의 단어를 골라 아침인사를 했다. 그러다 둘째가 깨면 나의 옆에 앉히고서 아침 식사를 준비하러 갔다. 고기반찬을 하면 내 그릇에 가장 듬뿍 담고, 그 다음은 샘의 그릇, 그 이후에는 아이들, 마지막에 본인은 야채나 국물만 펐다. 처음에는 고기를 몇번 돌려주려했으나 몇 번 시도 끝에 이건 예의가 아니라는걸 받아들였다. 손님은 골드니까. 그렇게 세끼를 다 챙겨먹었다. 인도에서는 세끼를 고봉밥으로 다 챙겨 먹는다. 점심이나 저녁에는 시어머니도 함께 밥을 먹는다. 그 때 나는 더더욱 불편한 마음이 커졌다. 누나는 열심히 저녁 준비를 하고, 음식을 퍼는 순서는 나, 샘, 시어머니, 아이들, 본인 순으로 돌아갔다. 아무리 기다려도 본인의 그릇을 준비하지않아 같이 먹자고 몇 번 말했지만 괜찮다는 제스처만 했다. 시간이 좀 지나자 8살배기 둘째는 그만 먹고싶다며 음식을 난잡하게 남겼고, 누나는 그걸 입으로 가져갔다. 손님을 대접해야해서 함께 먹을 수 없고, 어차피 아이들이 밥을 남기니 그걸 먹어야한다는 생각 같았다. 부엌에는 아궁이가 설치되어 있었고, 우리는 연기가 펄펄나는 그곳에서 밥을 먹었다.


시멘트 바닥에 카페트 하나 깔아두고서 연기가 가득한 이 곳에서 목 켁켁거리며 식사를 했다. ‘이게 맞나...’ 나에게는 화생방 훈련 같았지만 그들에게는 부엌이라는 소중한 공간이였다. 밥을 다 먹고 설거지를 하려고 그릇을 챙기자 시어머니와 누나는 두라며 손사래를 쳤다. 시어머니의 개입으로 누나가 더 난감해질까봐 나는 알겠다며 감사한 마음을 표현하고 그릇을 그대로 두었다. 시어머니는 좋은 분이셨다. 다만, 우리나라 80-90년대의 시댁문화와 닮아 있어서 내 마음 한구석에 미움이 조금 남아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건 그 분의 잘못이 아니고, 그렇게 형성된 문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내 잘못이었다. 


누나는 삼시세끼를 준비하고 설거지를 하느라 바빴다. 겨울인데 수도는 찬물 하나라서 아궁이에서 물을 데워 설거지를 해야했다. 어렵사리 쌓인 식기를 씻고나면 아이들의 숙제나 교육을 지도했다. 빨래도 해야했고, 소 젖도 짜야했다. 그 와중에 하루도 빠짐없이 나에게 간식을 가져다줬다. 그러다보면 어김없이 식사시간이 돌아왔다. 둘째는 온 가족의 사랑을 듬뿍받는 막둥이였는데 그 사랑을 주체하지 못해 밥 먹으며 설치다가 유리잔을 깨부수는게 N번째였다. 솔직히 나는 돌아버릴 것 같았다. 누나의 삶을 옆에서 보는 것 만으로도 벅찬데, 거기에 둘째의 과한 까불락거림이 더해지고, 사고를 치고나서 시어머니가 혼내지않고 그저 귀엽게 봐줘서 나는 또 ‘이게 맞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어리긴 하지만 잘못된건 아니라고 말해줘야 하지않나. 아이를 혼내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난 게스트고, 게스트 이즈 골드니까 가족 어른들이 넘어가는걸 내가 뭐라할 수는 없었다. 한줄기 희망은 샘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다는 점이다. 샘이 아이를 혼내며 잘못된 걸 짚어줬다. 그 이후 밥을 먹다 유리컵을 깨는 일상은 사라졌다. 


여기서는 샤워를 하는것도 일이었다. 샤워를 할려면 찬 물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물을 데워야했다. 물은 오래된 페인트통 같은 곳에 데웠다. 페인트 통에는 오랜 때가 묻어있어 물을 한참 끓이고 나면 알 수 없는  시꺼먼게 둥둥 떠다녔다. 식기가 쌓여있는 싱크대 배수와 샤워실이 연결되어있어 샤워할려고 쇠문을 열면 음식물찌꺼기가 한가득 있었다. 그걸 열심히 바가지로 뿌려 샤워실의 배수구로 내려가게 만들어야했다. 그러니까 내가 따듯한 물에 샤워하기 위해서는 안 깨끗하고 무거운 페인트통에 물을 가득 채워 아궁이가 있는 부엌으로 가서 한참을 기다렸다 물을 데워야한다. 하지만 누나는 내가 이렇게 하는걸 원하지 않았기에 샤워하고 싶을 즈음에 알아서 물을 데워놓고서 나에게 다가와 말했다. 


“곧 샤워할 수 있을거야. 조금만 기다려줘”


나는 바쁜 그녀를 괴롭히고 싶지않아 머리를 썼다. 리시케시에서 가져온 전기포트를 이용해 물을 빠르고 쉽게 데웠다. 그렇게 4번정도 물을 받아 원할 때 샤워를 하러갔다. 따듯한 물은 해결했는데 샤워실에서 보이는 밥알과 음식물 찌꺼기들은 도저히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깨끗해지려고 들어가는 공간에 더러운것들이 가득있다고 생각하니 씻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하루에 전기가 네-다섯번씩 나가 전기포트를 쓰는것도 쉽지 않았다. 이게 끝이 아니였다. 물에서 알 수 없는 약품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참을만한 냄새였는데 머문지 3일째즈음 되는 날부터 냄새가 강하게 올라왔다. 이맘때 누나는 내게 본인의 피부를 가리키며 여기와 지내면서 피부가 이렇게 바뀌었다고 말해줬다. 그녀의 손에는 울퉁불퉁한 티눈처럼 보이는게 많이 있었다. 그녀는 못생겼다며 본인의 손을 숨기고 부끄러워 했지만, 나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그래도 예쁘다고 말해줬다. 하지만 내 마음속은 두려움으로 가득 찼다. 그 날 아침에 첫째의 손에도 피부병처럼 울퉁불퉁한 티눈이 있는걸 봤기 때문이다. 혹시 강하게 나는 약품냄새와 관련 있지 않을까. 나도 혹시나 피부병을 얻게되면 어떡하지.  여러모로 씻는게 두렵고 힘든 일이였다.


오늘은 옆집에서 샘과 나를 식사 초대했다. 인도에서는 염소고기가 가장 비싼 고기 요리인데 나는 그 특유의 냄새가 맞지않아 먹을때마다 어려워했다. 물론 선택권이 있을때는 절대 선택하지 않는 음식이다. 하지만 나는 게스트. 게스트 이즈 골드. 이 집에 처음 온 날에도 먹었고, 초대받아 가는 이곳에도 분명 염소요리일거라 생각했다. 도착하자 염소고기의 냄새가 퍼졌다. 우리는 또 부엌이라고 부르는 시멘트바닥에 앉아 다 같이 밥을 먹었다. 할머니는 소녀같은 수줍음과 다정한 눈빛을 지녀서 보는것만으로도 사랑스러운 분이셨다. 만국 공용으로 할머니들은 고봉밥이 조금이라도 비는 것 같으면 한번 더 퍼줬다. 여기에 있으면서 체하지 않는 방법을 찾아냈다. 내가 배고프지 않을때도 워낙 밥을 많이주니까 적당히 느린 속도로 먹으면서 ‘배부르다’고 말하면 먹혔다. 반대로 빨리 먹으면서 ‘배부르다’고 하면, 그건 받아들여지지않아 고봉밥이 추가되는 상황으로 펼쳐졌다. 먹기 힘든 염소고기를 억지로 입에 넣어서 100번쯤 되새김질하며 겨우 씹었지만 게스트의 그릇에는 염소 고기 한 가득이였다. 갈 길이 멀었다. 겉으로는 아주 씩씩하게 맛있게 먹었다. 정말 맛있는 음식이라면 나도 속도조절이 안 되어서 한그릇 더 먹었겠지만 슬프게도 이 곳의 집밥은 다 내 입맛에 맞지 않았다. 게다가 나는 여전히 바닥에서 밥을 먹고, 음식물 찌꺼기와 함께 샤워하고, 아침에 눈뜨면 이불을 시멘트 난간에 펼치면서 소독했다고 생각하는 위생의 기준이 달랐다. 내가 아무런 생각 없이 맛있게 밥을 편하게 먹을 수 없는 환경이었다. 


모두가 내게 친절을 베풀어주고, 최대한 편하게 해줄려고 애써주는데 나는 불편했다. 이건 그들의 친절로 바꿀 수 있는 환경이 아니였다. 그 간극에서 엄청난 죄책감이 느껴졌다. 여기 오게 된 건 여행할 돈이 다 떨어졌고, 원래 샘은 종종 이곳으로 와 한달정도 머물다 간다했고, ‘그렇다면 나도 현지인 집 반달살이 하면서 많이 배우고 즐기고 가야지’ 싶었다. 한번 해봐? 라는 마음으로 호기롭게 왔는데 나는 부족한 사람이였다. 내가 편하게 씻고 먹을 수 없는 환경에 온전히 쉴 수 있는 시간도 없었다. 아침에 눈뜨면 아이들이 갑자기 문을 부수고 들어와 놀고간다. 모든 시간과 공간은 우리의 것이였다. ‘나’가 아닌 우리. ‘우리’의 삶보다 오로지 ‘나’에게 맞춘 삶을 살고싶어 본가에서 독립하며 살았다. 가끔 본가에 내려가 ‘우리’에 맞춰 시간이 흐른다고 느껴질 때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우리’의 세상에서 벗어나 내가 먹고싶은 것, 내가 하고싶은것에 집중하며 살아왔는데 다시 ‘우리’의 시간으로 돌아가야한다니. 그걸 받아들이는건 너무 어려운 일이였다. 죄책감과 불편함, 겉과 속이 다른 내 모습, 언제까지 있어야할지 고민스러움, 아무 생각없는 샘, 이 모든게 겹쳐지면서 나는 곧 터져버릴 것 같았다. 


샘에게 잠시라도 나의 공간을 만들어달라했다. 샘은 누나에게 내가 조용히 자고 싶어한다고 방을 하나 내어달라했고, 누나는 본인의 방을 내어줬다. 나는 힘든 마음을 꾹꾹 담아 일기를 막 휘갈겨 쓰다가 터져나오는 눈물을 하염없이 흘려보냈다. 혼자 방에서 울면서 타자를 휘갈기고 있는데 노크소리 똑똑똑 하더니 누나가 들어왔다. 따듯한 우유를 화장대 위에 올려놓고, 내가 덮고있는 이불을 한번 더 꼼꼼하게 덮어주었다. 그녀는 나의 눈물을 봤을텐데 모르는척하고 나가줬다. 나는 그 마음에 또 한번 엉엉 울었다. 이렇게 사람들이 친절하고 따듯하게 대해주는데 왜 성에 차지 않는가. 죄책감이 밀려 오면서도 일기장에 내가 하고싶은 말을 마음껏 썼다. 난 깨끗한데서 자고 먹고 싸고 씻고 싶다고! 너무나도 가족적인 문화도 싫고! 뭐 하나 할라해도 다 우리야. 내가 없어. 이게 너무 싫다고! 갑갑해! 아무도 듣지 않을 곳에서 외쳤다. 그러면서 이 모든 과정을 즐기지 못하는 나에 대해 실망스럽고 화가났다. 나를 혼내고 죄책감을 느끼는걸 반복하다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지 몰라 엉엉 울기를 반복했다. 꺽꺽거리며 울고나니 속이 시원해졌다. 내 마음 속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는 시끄러운 목소리를 모두 삭제하고서 결심했다. 지금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걸 하자. 손님으로 최대한 즐기고, 나를 이 문화에 완벽하게 넣으려 하지말자. 나는 이방인이고 외국인이니까. 여기에 모든게 완벽하게 어울릴 수 없어. 못 받아들이는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자. 다른 문화잖아. 못 받아들일 수 있고 그래도 된다. 거기서부터 시작하는거야. 나는 여러번 주문을 외웠다. 


우리나라는 친척이든 가족이든 이틀만 지나도 오래있는거지만, 샘은 이곳에 오면 두 달정도 머물다 간다고 했다. 생각해보면 쿠슘네 집도, 이 집도 방이 많았는데 언제든 가족들을 맞이할 수 있게 준비된 방이 아니였을까 싶었다. 민폐라는 생각으로 미안해하기 보다는 감사히 대접을 받고 나중에 갚기로 마음먹었다. 여기 있는 동안 아이들과 더 많이 놀아주고, 한국 요리를 해서 새로운 문화를 교류하는게 내 역할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마음의 결론을 내리고서야 눈꺼풀이 두꺼워져 노트북을 덮고 낮잠을 잤다.


그 날 이후로 나는 시장에서 나물을 이것저것 사 비빔밥을 만들어주고, 리시케시에서 사온 라면을 끓여주기도 했다. 아이들과 낚시를 하러 가기도 하고, 강 주변에 산책을 가기도 했다. 내 마음 속에 돌아다니는 수 많은 목소리를 음소거하고, 하나의 목소리를 모으니 꽤 즐거운 일상이였다. 나는 게스트놀이를 생각보다 잘 즐겼다. 누나가 가져다주는 우유와 간식을 매번 맛있게 먹었다. 샤워를 해야할 때는 샘에게 뜨거운물과 깨끗한 샤워실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고, 아이들이 갑자기 쳐들어와 온 방을 헤집고 난리칠 때는 혼자 옥상으로 가 뜨개질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겉과 속이 다른 내 모습에 갑갑해질 때면 샘에게 산책을 제안하고 솔직한 마음을 고백하기도 했다. 나는 자연스럽게 누나집에 적응하고 있었다.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던 어느날 첫째 까나의 생일이 다가왔다. 누나는 바쁘게 요리를 준비했고, 샘과 나는 시내에 선물을 사러갔다. 집으로 돌아와 몰래 선물을 포장하고나니 어느새 밤이였다. 샘은 조카들을 위한 신발을 샀고, 나는 첫째가 나의 큰 헤어밴드를 자주 쓰길래 그의 머리에 맞춰 헤어밴드를 손수 떴다. 그 날은 엄마의 날이기도 하니까 구멍난 양말을 부끄러워했던 누나의 모습을 떠올리며 양말을 떴다. 우리는 카드까지 완벽하게 작성하고서 가장 넓은 방으로 갔다. 그곳에는 아이들이 직접 꾸민 풍선 장식품, 누나가 열심히 만든 음식, 화려한 케이크, 지내면서 한번씩은 마주쳤던 동네 어른들이 다 모여있었다. 다 같이 모여 생일 노래를 부르고, 돌아가며 이마에 띠까를 바르고, 까나는 본인의 파티에 온 모든 사람들의 볼에 생크림을 묻혔다. 어른들은 까나에게 돈을 주며 덕담을 건넸다. 그곳에 모인 모두가 까나의 생일을 축하했다. 그 날의 까나는 천방지축 10살로 돌아가 시도 때도없이 웃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그 날을 마지막으로 우린 다음날 떠났다. 떠난다고 하니 동네 사람들이 가져가라며 직접 짠 오렌지 주스와 우유를 챙겨주셨다. 내가 귀여워했던 할머니는 샘과 포옹하면서 울기도 했다. 시어머니와 누나는 용돈을 챙겨주셨다. 샘 뿐만 아니라 나에게까지 챙겨줘서 너무 놀랬다. 언제 또 보냐면서 안아주고 눈물을 흘리셨다. 누나 남편은 우리가 편하게 근교도시로 갈 수 있게 택시를 미리 예약해뒀고 우리는 지갑을 열 필요가 없었다. 도착한 곳에는 편히 잘 수 있게 숙소도 예약해주셨다. 지내면서 나는 다 얻기만하고 드린게 없었다. 끝까지 사랑만 받고 떠나게 되는 것 같아 너무 감사하고 미안했다. 오묘한 감정을 가득 담은 택시는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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