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보내고 방을 뺐다. 3주간 먹고 자고 무료하게 즐겼던 이 집을 떠나 약속한대로 샘 누나네로 간다. 샘 누나의 남편은 개인 택시기사인데 인도에서는 버스 시간이 일정하지 않다보니 현지인들도 공유하는 택시를 많이 이용한다. 대부분 지프차로 좌석에는 사람들이 타고, 짐은 차 위에 적재한다. 승객의 택시비는 버스와 마찬가지로 거리에 따라 다르게 산정한다. 누나의 남편은 몇일 전 리시케시 근처에 승객을 태우러 나갔다가 본인의 집 쪽으로 돌아갈 승객을 몇일 째 기다리고 있었다. 승객 없이 돌아가기엔 기름값이 아까워 근처에 저렴한 곳에 숙박을 하며 영업을 뛰고 기다리는 중이였다. 그러다 승객이 어느정도 모였고, 우리도 태워가는 날이 맞아떨어졌다. 새벽에 집을 나와 그의 차를 기다렸다. 자리가 없을 정도로 승객을 태워서 트렁크같은 자리에 앉아갔다. 몇시간을 가다 작은 가게에 들렸다. 그는 나에게 짜이를 수줍게 건넸다. 반갑다며 자리가 괜찮냐고 물었고, 나는 코이띠까네이를 외쳤다. 나는 옆옆 동네라길래 몇시간인줄 알고 조금만 더 참자. 멀미 때문에 헛구역질이 올라와도 조금만 더 참자 스스로에게 외쳤다. 나는 역시 외국인이였고, 여긴 아주 넓은 인도였다. 아무리 달려도 도착할 기미가 안 보여 샘에게 얼마나 더 가야하는지 물어봤다. 아직 반도 안 왔다고 말한 때가 탑승한지 5시간이 넘어갈 때였다. 가는길에 큰 시장이 나와 가족들에게 줄 달달한 음식, 까짝, 아이들이 먹을 초코 시리얼을 샀다. 시골 풍경으로 접어들길래 이제 다왔구나 싶었는데 모든 차가 멈춰섰다. 또 공사다. 하나밖에 없는 외길에서 포크레인 한대가 열심히 일하고 있다. 길을 다 막고서 돌을 옮기고 흙을 파내느라 바쁘다. 많은 운전수들이 내려서 한참을 쳐다본다. 본인들끼리 이런저런 얘기를하며 웃는다.
웃음이 나와? 또 나만 화가나고 이해할 수 없었다. 길이 하나밖에 없는 곳에 공사를 할거면 대체 루트를 파던가 언제 끝나는지 알려줘야 하는거 아니야? 무책임하고 무신경한 인도 정부에 화가 났다가 그걸 멀뚱히 보면서 아무렇지않은 인도 사람들에게 화살이 돌아갔다. 화가났다. 바보같이 웃고있는 인도 사람들이 미웠다. 당신들이 이러니까 이 세상이 안 바뀌는거 아니요. 불공정한것에 대해 맞서 싸워야되지 않나요? 누군가를 탓하고 책임을 전가하는 못난 미움과 값싼 분노는 30분만에 멈췄다. 화를 내봤자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걸 깨달았다. 모든걸 내려놓고 과자를 하나 뜯어 주변 풍경을 구경했다. 거기에 있는 누구도 공사가 언제 끝내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누나 남편에게 과자를 건네며 말 없이 입에 넣었다. 그렇게 또 30분이 흐르자 그제서야 인도 사람들은 1시간 전의 나와 같아졌나보다.
“삐삐-”
몇명이 경적을 울렸다. 이제서야 화가 난다고요? 아무래도 인도와 나는 다른 시간을 사는게 틀림없다. 경적 소리가 조용한 시골을 감싸자 공사일을 하던 사람들은 위기감을 느꼈나보다. 다급하게 포크레인을 정리하는 것 처럼 보였고 대기하던 몇몇 사람들과 대화를 하더니 오토바이가 슉 지나갔다. 차가 지나갈 수 있도록 포크레인이 계속해서 돌을 치웠다. 조금의 틈으로 오토바이가 몇대씩 지나갔다. 운전하는 사람들은 양손을 하늘 위로 들고 행복해했다. 불행은 나만 느끼고 행복은 인도 사람들이 온 몸으로 느끼는 시간이 흘러갔다. 누나 집에 도착하니 어두운 밤이 되었다. 조그만한 아이들이 꽤 많았고, 누나는 바쁜 와중에 아주 따듯하게 날 안아주고 환영해줬다. 그곳에는 다른 어른들이 많았다. 대..가족...의 집에 온건가.. 뭐지...? 샘이 뭐라뭐라 자꾸 소개하는데 아까 분명 큰 엄마라고 했는데 여기도 큰 엄마고, 큰 형이라했는데 여기도 큰 형이고, 이 분은 시어머니라했는데, 뭐라고? 시어머니? 나는 놀란 마음을 뒤로하고 헬로, 헬로, 땡큐, 땡큐 인사했다.
알고보니 샘 누나는 남편, 두 명의 아들, 시어머니, 시아버지, 남편의 큰 형, 옆 집에 시댁의 먼 친척과 함께 살고 있었다. 얼마 전 근처 마을에서 페스티벌이 있어 남편쪽 다른 친척들이 놀러왔고, 3개의 집안은 족히 넘어보였다. 원래 식구에 세 집안의 끼니를 챙긴지 일주일이 다 되어간다고 했다. 나는 그 순간 너무 미안해졌다. 게스트 이즈 골드인 세상에 이미 게스트가 너무 많은데 우리가 또 게스트로 왔으니 말이다. 골드고 나발이고 누나가 너무 힘들겠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인도는 우리나라의 70-80년대 문화와 비슷해서 여성이 집안에 많은 역할을 한다. 빨래, 집정리, 주방일, 아이들 양육, 시댁 모시는것까지 모두 다 그대로 남아있었다. 내가 그녀를 도울려고 해도 그녀뿐만 아니라 시어머니가 가만두지 않았다. 도울려고 팔을 걷어부치면 시어머니는 그녀에게 더 몇마디를 보태서 나는 가만히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녀에게 짐이 되기 싫었던 난 샘에게 빨리 떠나자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게 된 누나는 곧 눈물이라도 떨어뜨릴 듯 서운해했다. 나는 여기가 너무 좋은데 지금 때가 아닌 것 같다고 손님이 너무 많아서 힘들 것 같으니 다음에 다시 오겠다고 했지만 그녀는 여기가 너무 별로라서 그렇냐며 미안해했다. 나는 노우노우와 아이 라이킷을 백번쯤 외치며 여기에 오래 머물고싶다고 말해버렸다. 그제서야 활짝 웃던 그녀가 손님들은 내일이면 떠날거니까 걱정말고 푹 쉬라면서 큰 방을 내주었다.
누나의 남편은 다시 승객을 태우러 떠나고 없었고, 누나는 친척들을 챙기느라 바빴다. 바쁜 와중에도 나에게 커피나 우유를 가져다주면서 가장 귀한 손님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남편의 큰 형은 샘이 온 사실을 알고 바로 샘을 불렀다. 샘은 잠시 다녀와야겠다면서 그 길로 떠나 한참 오지 않았다. 그 사이에 친척 아이들이 내 곁을 둘러 앉았다. 아이들은 수줍어하면서도 본인들끼리 깔깔깔. 어떤 아이는 나를 희화화하는 것 같았다. 힌디어를 알 수 없었지만 그들의 눈빛과 태도로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들 눈에 나는 맥북에 애플워치에 에어팟에 아이폰에 고프로를 가지고 있는 부자였다. 내가 애플제품을 이렇게나 많이 쓰고있는지 깨달은건 이때였다. 한 친구가 아이폰은 얼마인지, 고프로의 가격은 어떤지 물었다. 나는 워낙 비싸서 중고로 산거라고 말하며 금액을 알려줬다. 가격을 듣고 엄청 놀라면서 확신의 눈빛을 가졌다. 그 이후에도 그 친구는 내 물건을 만지며 계속 가격을 궁금해했다. 다른 친구들은 물건 자체에 관심을 가졌지 가격에 대해 물어보지 않았다. 그 때부터 나는 조금씩 불편해졌다.
내가 믿고있던 사라한에서 돈을 도난 당했고, 그 범인이 같이 페스티벌에 놀러갔던 동네 친구였다는 사실을 샘과 여행하면서 알게됐다. 그 뒤로 돈에 대해서는 사람을 너무 믿지말고 알아서 관리하기로 다짐했다. 친척 아이들은 우루루와서 곁에 있다가 다시 또 떠나기를 반복했는데 떠난 사이에 내가 갖고있는 모든 장비를 가방안에 넣어두었다. 다시 돌아왔을 때 그 친구는 여전히 나를 이용해 아이들을 웃겼고, 그보다 조금 더 큰 친구는 무례하다고 생각했는지 정색을 하고 따끔한 소리를 하는 것 같았다. 그 순간 아이들의 웃음이 멈췄고 분위기가 괜히 어색해지기도 했다. 고마웠다. 나를 앞에 두고서 알 수 없는 웃음이 오가는건 꽤 거슬리고 불편한 일이였다.
아이들이 우루루 사라지자 아이들의 부모인 어른들이 돌아가며 찾아왔다. 다시 알 수 없는 힌디어의 세상에 빠졌다. 이번에도 그들은 나를 앞에 두고서 본인들끼리 대화하며 웃었다. 그래도 아이들과 달리 그들의 따듯한 눈빛이 있어서일까 기분이 마냥 나쁘지만은 않았다. 순식간에 많은 사람들에게 관찰당하고 있으니 나는 실시간으로 기가 쭉쭉 빨렸다. 알아들을 수 없으면서도 귀를 쫑긋 세워 무슨말을 하려는지 들어보려했고 그들이 웃으면 나도 따라 웃었다. 그러다 알아듣는 줄 알고 힌디어 무더기를 듣게 되면 노,힌디 랭기쥐, 온니 잉글리쉬, 쏘리 라며 뒷걸음질 치기 바빴다. 샘 이노무시끼는 아직도 안오냐며 속으로 화를 펄펄 끓이며 겉으로는 누구보다 밝게 웃고 있었다. 새벽부터 이동했는지라 마음같아선 다 나가주세요 조금 쉴게요, 하고서 이불 덮고 자고싶었지만 여기에 내 공간은 없었다. 불편한 마음이 조금씩 커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