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정을 즐기는 건 쉽지 않은 일이기에

겨울의 식탁 1. 프렌치 어니언 수프

by 숨소하

프렌치 어니언 수프는 어쩐지 이름부터 거창하다. 궁전 같은 집에서 우아한 식기를 들고 화려한 원피스를 차려입고 먹어야 할 것만 같은 음식이다. 어떻게 보면 거추장스러운 음식이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판타지 로망을 채워주기에 아주 적합한 음식이다


프렌치 어니언 수프는 정말 겨울 음식이라고 생각되는 음식 중 하나다. 우선 온도가 따뜻하고, 양파가 몸의 열기를 내주는 식재료이며, 무엇보다 수프를 끓일 때 나는 보글보글 소리가 (!) 겨울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이 수프는 사실 끓일 때 시간이 어마무시하게 드는 음식이다. 결과물로 나온 건 겨우 수프 한 그릇이지만 만드는 데는 장장 3시간이 걸린다. 수프를 끓일 때 들어가야 하는 캐러멜 라이징 양파 때문인데, 버터 한 조각을 넣고 양파를 잼이 될 때까지 볶는 것이다. 양파를 몇 시간이고 타지 않게 볶다 보면 어느새 맛있는 냄새가 솔솔 올라온다. 그제서야 물을 붓고 양념을 더해 수프를 끓일 수 있다.


처음에 유튜브에서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어니언 수프 영상을 발견하고도 몇 년 동안 도전하지 않은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수프 하나를 끓이는데 양파를 몇 시간이나 볶아내야 한다는 건 너무 지치는 일이니까. 하지만 어니언 수프를 맛봐야겠다는 나의 집념이 귀찮음을 이긴 어느 날부터,

나는 매 겨울 양파를 볶는 여자가 되어버렸다.


그렇게 된 데에는 달달하고 부드러운 어니언 수프의 탓도 있지만, 사실 조리 과정 때문이 더 크다. '앞에서 귀찮다고 해놓고 무슨?'이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어니언 수프의 묘미는 바로 이 귀찮음에 있다.


어니언 수프를 만드는 날은 정해져 있다. 함박눈이 펑펑 오는 날의 밤, 그날이 바로 어니언 수프를 만드는 날이다. 창 밖으로는 흰 눈이 깔려있고 식구들은 모두 잠에 든 어두운 밤, 부엌에 은은한 조명 하나를 켜고 양파를 채 썰어 아주 조용히 볶기 시작한다. 밝은 빛과 소음에 정신이 없는 낮과 달리 밤에 양파를 볶고 있자면 느껴지는 것은 오로지 양파가 지글지글 볶아지는 소리와 양파에서 나오는 달콤한 향뿐이다. 한참을 그것들에 주의를 두고 있자면, 어느새 소란했던 마음이 차분해진다. 이것이 곧 내가 느끼는 겨울이기도 하다.


다들 말하기를 뭔가 잘하려면, 성공하려면 과정을 즐겨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나는 과정보다는 결과에 집착하는 사람이다. 시작도 전부터 이런저런 결과들을 상상하며 즐거워하다가 막상 과정에서는 지쳐 시작도 못한 채 접는 일이 다반사이다.

그래서일까? 유독 어니언 수프를 만들 때 큰 만족감을 얻는 이유가, 내가 뭔가 과정 그 자체를 즐기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인 것 같다.


과정을 즐겨야 한다는 말조차 어쩌면 이 세상의 정형화된 성공의 틀의 하나일지 모르지만, 나는 어느새 그런 틀 안에 갇힌 어른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오히려 무언가를 할 때 즐기지 못하는 나를 타박했는지도 모른다. 그런 뜻의 말이 아님을 알지만, 모든 좋은 말은 내 삶에 직접 적용하기란 참 어려운 일이다.

과정을 즐기는 건 어렵고, 과정을 즐겨야 한다는 생각을 내려놓는 건 그만큼 더 어려운 일이기에 늦은 새벽 양파를 볶을 때만이라도 뭔가를 즐겨야 한다는 어려운 마음을 내려놓고 수프를 만들고 싶다.

아무 생각도 없이 수프를 계속 만든다. 올해 겨울밤도 고요히 혼자 양파를 볶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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