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고픈 핫초코의 맛

겨울의 식탁 5. 핫초코

by 숨소하

겨울 하면 떠오르는 것 중에서 핫초코를 빼먹을 수 없다. 핫 초콜릿, 초콜라 쇼, 초콜릿 라테. 많은 이름이 있지만 나는 핫초코란 이름을 고수한다. 어렸을 때 처음 접한 '미떼 핫초코'의 상표명 덕분에 어린 시절 추억의 맛은 '핫초코'로 정해졌다.


추운 겨울 눈이 펑펑 내리던 날, 거실에 난 작은 문을 통해 오고 가며 눈놀이를 했다. 한참을 놀다 보면 두 손과 볼이 모두 꽁꽁 얼어 집에 들어와 전기장판 속에 들어가 몸을 녹이곤 했다. 그때 먹는 핫초코의 맛은 세상 진미를 가져다주어도 이길 수 없는 맛이었다.


또 우리 엄마는 가끔 늦잠을 자 아침을 못 먹고 등교할 때면 들고 가며 요기하라고 꼭 핫초코 한 잔을 타주곤 했다. 우유로 탄 핫초코는 먹다 보면 은근히 배가 불러 든든한 아침밥이 되어주었다. 특히 날씨가 쌀쌀해질 무렵엔 손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손난로 역할도 도맡아 했다. 집에서 학교까지 거리가 멀지 않아 먹는 속도가 느렸던 나는, 매번 정문 앞에 멈춰 서서 핫초코를 원샷에 전부 마시고 들어가곤 했다.


이렇게 핫초코에 대한 추억이 많지만, 난 핫초코 레시피가 없다. 겨울의 대표 음료라고 생각해서 이것저것 유명한 레시피를 시도해 보았지만 아직까지 '이거다!' 하는 레시피를 찾지 못했다.

인터넷 레시피들을 따라 해보며 이 향신료, 저 초콜릿 등 각종 재료를 넣어봤지만 너무 달거나 너무 밋밋한 레시피가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아직도 핫초코 레시피를 찾아가는 여정 중에 있다.


핫초코 레시피를 계속 시도했던 건 아직 나만의 완벽한 레시피를 찾지 못했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뭔가 비어있고 부족한 것이 있는 걸 나는 잘 참지 못했다. 그러다 핫초코에 대한 열망을 내려놓고 인스턴트 핫초코 믹스를 계속 타마시던 요즘, 핫초코로부터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


세상은 늘 완벽하게 흘러가고 있고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는 나의 가치관 때문인지, 나는 특별히 후회하는 순간이 없다. 하지만 누군가 내게 타임머신을 타고 어느 때든지 딱 한 순간만 돌아가게 해 준다고 한다면, 돌아가고 싶은 세상이 있다.


바야흐로 고등학교 시절, 첫사랑을 시작했을 때. 사랑이 무엇인지 몰라 이런 게 사랑일까, 진정한 사랑이 맞을까, 스스로의 사랑을 의심했던 때가 있었다. 사랑을 하면 하늘이 분홍빛이라는 말이 시적 은유가 아닌 사실이었다는 말을 깨닫고 있었던 시절, 누군가 내게 사랑을 완성시켜 준다면 무엇이라도 전부 내줄 수 있을 것 같았던 시절, 그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다.

물론 그때가 있었기에 지금이 존재할 수 있는 거겠지만, 오로지 그때만 느낄 수 있었던 사랑스러운 감정들이 있다 (나쁘게 말하자면 조증에 걸린 것 같았던 감정들이지만)


우스운 건, 그때엔 그 감정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난 자꾸 뭔가를 잘하려고 한다. 힘을 잔뜩 주고 부족한 것을 두 눈 뜨고 보지 못한다. 요즘 말로는 완벽주의. 그래서 사랑에 서툰 내가 예뻐 보이지 않았다. 더 빨리 잘하고, 더 빨리 능숙해지고 싶어서 몸집을 잔뜩 부풀려 되지도 않는 허풍을 떨어댔다.


지금 와서는 가장 그리운 감정이다. 그리운 이유는 돌아갈 수 없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전개에 익숙해져 버린 지금은, 결코 사랑이 서툰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사랑에 서툴 때만 느꼈던 감정을 다시 느끼는 게 참 어려운 것이라는 걸, 전부 지나고 나서야 깨닫는다.

모든 것은 일어나야 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니 후회는 없. 그러나 살아가며 다시 느낄 수 있을지 없을지 미지수인 그 감정을 다시 한번 느껴보고 싶다는 작은 소망이 남아있다.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 감정을 잘 음미해 줘야지, 하는 작은 다짐이 남있다.


서투른 사랑의 감정이 그리운 것처럼 지금의 서투른 무언가에서만 느낄 수 있던 어떤 감정들도 결국엔 그리워지는 순간이 올까? 핫초코를 아주 잘 만들게 되었을 땐, 핫초코 레시피를 고심하느라 느꼈던 감정들을 다시 느끼고 싶어 질까?

알 수 없지만 지나가고 나서 그때를 좀 더 잘 누려볼 걸, 후회하지 않기 위해 그냥 지금을 살아가려는 다짐을 한다. 어떤 감정이 돌아가고픈 세상이 될지 지금의 나는 알 수 없기에.


좀 서툰 것들을 그냥 지켜봐 주는 인내심도 길러보려고 한다. 모자랐을 때만 느낄 수 있는 감정들이 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나에겐 완벽한 핫초코 레시피가 없어도 충분히 겨울을 잘 보낼 수 있는 미떼 핫초코가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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