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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한나 Feb 26. 2023

이별을 준비하는 시간들

서울, 그 어딘가로 떠날 준비

1. 떠날 준비

곧 3월, 새학기가 시작되니 서울로 올라갈 준비를 했다.

짐들을 싸고, 방 정리를 하고 가족과의 시간도 보냈다. 동생도 수도권의 대학을 다니다보니 며칠 전에 먼저 떠났는데, 떠나기 전 날 여자친구가 생겼다고 가족들께 발표했다. 전여자친구를 다시 만난다고 한다. '이번 학기 장학금은 물 건너 갔네-' 아버지는 농담처럼 말씀하셨다. 동생이 조금 부러웠다.


떠나기 전에는 항상 할 일이 많다. 이별과 시작을 함께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창업가이자 작가이자 공연 예술가이자... 대학생이자... 또 뭐시기 뭐시기... 맡은 일들이 많은 사람들, 그럼에도 이것도 저것도 아닌 애매모호한 인간들은 특히 바쁘다. 무엇 하나 놓는 법을 몰라서 사랑을 먼저 포기한 인간들.

어쨌건, 창업과 관련된 업무들을 처리하고, 수많은 지원서를 작성하고, 영상 편집에 계획서 작성에...... 남아준 연들과도 인사하고, 밥도 먹고... 혼자만의 여유도 나름 즐겼다. 다른 또래들은 이런 여유로운 날들이 훨씬 많겠지. 마침 요즘은 날씨도 좋구나.



2. 외로움에 관하여

혼자만의 여유라 함은 뭐, 수많은 쾌락도 있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혼자 담배를 피거나,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거나... 그런 것들도 모두 포함이다. 그 중에서도 기억에 남는 것은 영화. 새벽 넘어까지 영화를 보느라 다음 날을 통째로 날렸다.

영화는 외로움에 관한 내용이었다. 죽음조차 고사하게 만드는 외로움. 굉장히 매혹적이고도 품격있었다. 그리고 야했다. 영화를 보고 난 후 자위를 했다. 사실 영화도 그러려고 본 것인데, 생각보다 재밌어서 다 본 후에야 한 것이다. 그래서 새벽까지 넘긴 것.

2시간 정도 잔 뒤 남은 일들을 처리하겠다고 설치다가, 오후 2시쯤 되자 몸이 안 따라줘서 엎어지고 말았다. 누구라도 만나볼까, 또 외로움을 달래줄 쾌락을 찾으며 가위라도 걸린 듯 눈만 동동 뜬 채 어플을 꼼지락 댔다. 그러다 결국 잠들어 버렸다. 4~5시간 핸드폰만 본 것이다. 그 뒤 12시간 넘게 잤다. 잠을 줄이려고만 하다가, 이렇게 고꾸라져 깊이 잠,기는 것- 그것도 꽤나 해볼만 한 일이었다. 마침 다시 마주한 날씨도 무척 좋았다.


3. 아주 오래된 연인

어느 낮, 어머니와 마라탕을 먹었다. 집 앞에 생긴지 몇 년 된 마라탕 식당이 있는데 이제야 처음 가본 것이다. 어머니는 중국 당면은 좀 별로네, 떡을 너무 많이 넣었네, 꿔바로우 양이 많네, 혼자 먹기엔 꽤 비싸네- 같은 말들을 하셨다. 내가 느끼기엔 조금 짠 것 외에 꽤 괜찮은 맛이었다. 그게 우리의 마지막 데이트였다.

그리고 그 날 밤 나는 농구를 하러 떠났고, 어머니는 집에 혼자 남아 TV를 보셨다. 익숙한 일상. 다만 그날 저녁 조그마한 사건이 생겼다.

새벽 12시 쯤 농구가 끝나고 집 앞 놀이터에서 전화로 친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참이었다. 아버지의 부재중 전화 알림과 메시지가 여러 통 날라왔다.

"왜 전화를 안 받니. 엄마는 전화기도 꺼져있고..."

조금은 흥분된 목소리. 위기감을 느껴 바로 집으로 들어갔다. 아버지의 얇은 입술 사이로 취기가 새어나왔다.

"요즘 핸드폰 충전 안 되는 데가 어디있니. 지금 이 시간까지 어디 간다는 말도 없이 전화기가 꺼져있는 게 말이되니. 걱정이 되잖아. 엄마가 말이야..."


조금 웃음이 나왔다. 어머니를 걱정하는 아버지... 물론, 부부싸움으로 번질 수도 있는 상황이라 완전한 안심은 아니다만, 그럼에도 그런 아버지가 꽤 귀여워 보이셨다. 1시 반쯤 아버지는 잠에 드셨고, 어머니는 다행히 곧이어 멀쩡히 귀가하셨다.


"엄마, 그래도 전화기는 켜놔야지."

"그래, 알겠어. 내일 사과해서 아빠랑 잘 풀게."


나의 다그침에 어머니는 수긍하셨고, 약간의 변명도 하셨다.


"한 10시쯤 되니까 말이야... 다들 집 밖에 나가있는데, 나 혼자서 조금 허전하더라고. 괜히 억울하기도 하고... 그래서... 그래서 나갔지. 오랜만에 조금 마신 거야. 맥주 두 잔 딱 마셨어."


그래, 젊은 나는 어머니를 백 번이고 이해할 수 있었다.

"전화기는 배터리 충전 시킨다고 점원한테 맡겨 놓느라 그랬어."

그 점 역시도.

다음 날 아침, 두 분은 언제 그랬냐는 듯 아주 잘 화해하셨다.


아버지도 어머니를 불안해하고 걱정하는 분이셨고, 어머니도 외로움을 느끼시며 그것을 해소할 수 있는 분이셨다. 어느 평범한 연인다운 모습들이란 생각에 안심과 부러움이 함께 느껴졌다.


4. 나는 어디로

어머니는 연수를 위해, 아버지도 어딘가로 떠나신 어느 날 좋은 주말 오후. 나는 집 앞에 나와 담배를 한 대 태웠다. 담배는 고민이 섞이면 맛이 더 잘 스민다. 끊어야하는데 하루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겠다는 신호총으로 한 대 정도는 괜찮지 않은가- 하는 주장으로 자신과 타협했다.



이제 곧 서울로 떠난다. 이제 떠난다, 곧 서울로. 서울, 향락과 불안이 공존하며, 어디든 낯설고 자유롭고, 외로움이 증폭되는 세상. 그 속에서 나는 온전히 섞이지 못하고 방황하고 방황할 테다.

이건 비밀인데, 한 가지 불안 요소가 더 추가 되었다. 3월 10일까지 지낼 곳이 없다는 점. 때를 놓쳐 기숙사에 늦게 신청하고 말았다. 그래서 3월 2일에 결과 발표가 나고, 3월 10일부터 입주할 수 있다고 한다. 붙을 지도불확실하지만, 일단 붙는다고 치고 3월 10일까지 어디에서 지낼 수 있을까.


몇몇 지인들에게 재워달라는 부탁을 해두었으나 불안함은 여전하다. 뭐 언제는 안 불안한 적 있었나. 일단 어디든 지내다보면 지내지겠지- 하는 생각으로 어디든지 지내볼 생각이다. 여차하면 이전처럼 이름도 모를 여자네 집에서 묵어보든지... 겨우 일주일인데 뭐, 큰일이라도 날까...


연거푸 불안을 내뱉은 뒤 다시 오늘로 돌아갔다. 미래의 불안을 최소화하기 위해선 오늘의 불안을 먼저 해결해야만 했다. 어떻게든 되겠지- <뭐라도 되겠죠>, 내가 쓴 책 제목처럼 말이다.



웃기는 일이야.

그 어린 날의 확고한 신념이

불과 몇 년 새 멍청한 변명따위로 전락해버리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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