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 책에서는 길 냄새가 난다고 했던 건 J였다.
오늘도 J의 산책길은 동네 도서관에서 끝난다. 산책길에 들고 나온 책을 도서관에 반납하고 새 책을 대출해가는 식이다. 그리고 다음날 산책길에 그 책을 들고 나와 동네 한 바퀴를 돈 다음 다시 도서관으로. 사람도, 책도, 한 바퀴 둘러가는 산책길이다. 공원이 많은 동네라 벤치도 제법 있지만 앉아서 책을 보는 일은 거의 없다. 책은 항상 왼쪽 팔꿈치에 끼워져 있다가 도서관 자료실로 반납된다.
J와 책이 지나가는 산책길에 서점이 한 곳 있다. 팔꿈치에 항상 책 한 권을 끼고 나타나는 손님이 서점주인의 눈에 띄지 않을 리 없다. 손님이 없는 서점의 오후. 아니 손님이 없는 오후의 서점이라고 하자. J가 서점 문을 연 그 시각에 서점주인 C는 새로 들어온 책들을 훑어보고 있었다. 새로 들어온 책들이지만 모두 신간은 아니었다. 그 중 한 권, 보르헤스의 단편집 <픽션들>이라는 책을 C는 꽤 오랫동안 들여다보고 있었다.
먼저 말을 건 것은 의외로 J였다.
“손님이 없네요.”
“네. 이 시간엔....좀 그렇죠.”
머쓱하게 웃는 C의 손끝에 J의 시선이 멈췄다.
“그거, 한 번 해보실래요?”
“?”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이야기”
그러면서 J가 팔꿈치에서 풀어놓은 책도 <픽션들>이었다.
“아, 이런 우연도 다 있군요.”
“하실래요, 이야기?”
“예, 어떻게요?”
“한 사람이 첫 문장을 시작하면, 다음 사람이 이어서 다음 문장을 말하는 건데, 정해진 행로가 아니라 다른 행로로 길을 바꾸는 거예요. 이를테면, '결혼식은 1시간 후로 예정되어 있었다'고 하면, '그러나 결혼식장에 신랑도 신부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런 식인 거죠. 해보실래요?”
재미있을 것 같았다. C는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제가 먼저 시작할게요.”
J가 잠시 서점을 둘러보더니 첫 문장을 던졌다.
<길은 여기까지인 것 같았다.>
C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J가 다음을 이어가라는 뜻으로 눈을 찡긋했다. 너무 오래 생각하면 안 될 것 같았다. C는 순간 떠오른 다음 문장을 이어 붙였다.
<돌아갈까 생각하고 둘러보는데 울타리 한 쪽이 무너진 것이 보였다.>
<울타리는 높지 않았지만 그는 알 수 없는 울타리 너머로 발을 디디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그 때 뭔가가 그를 밀었고, 그는 울타리 너머로 내동댕이쳐졌다.>
“슬슬 재미있어지는데요...울타리 너머라... <울타리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어렵군요. 아무것도 없는 울타리 너머는 뭐죠?”
J는 소리 없이 웃었다. 이야기는 그렇게 한참 이어졌다. 한 시간 쯤 지났을까. 단골손님이 들어오면서 이야기는 중단되었다. C는 아쉬운 표정으로 J를 보냈다. 다음날 C는 저도 모르게 J를 기다렸다. 그러나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J는 나타나지 않았다. J의 행방을 궁금해 하고 있는 사이에,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두 사람이 시작한 이야기가 어느 갈래로 뻗어나갈지 궁금해 하고 있는 사이에 춥고 긴 겨울이 지나갔고, 산책하기 좋은 봄이 왔다.
그리고 손님이 없는 어느 오후의 서점.
신간 한 권을 읽는데 몰두하고 있던 서점주인 C는 문에 달아놓은 풍경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문은 열리지 않았다. 문 밖에는, 지나가는 바람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