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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소희 May 08. 2020

아버지의 섬에 가고 싶다

학도병들의 운명은 고작 7일을 살다간 매미의 삶보다 더 슬프고 안타깝다



나에게 6월은 전쟁의 기억을 덮고 살았던 아버지의 속내만큼이나 무거운 계절이다. 아마도 여름을 앞둔 70년 전의 매미 소리는 짙푸른 녹음만큼이나 요란했을지도 모른다. 소련제 탱크가 지층을 흔들며 남하할 때 수컷은 절규에 가까운 날갯짓으로 암컷을 불렀을 것이다. 다급하긴 암컷도 마찬가지였겠지. 서둘러 짝짓기를 끝내야 하는 매미들의 7일은 짧았다. 하지만 천적으로부터 유충을 숨겨야 할 나무가 폭격으로 쓰러지고 젊은이들이 흘린 피로 산천이 붉게 물들어갈 거라는 것을 어찌 알았겠는가. 교실을 박차고 무거운 총을 집어야 했던 학도병들의 운명은 7년을 기다려 세상에서 고작 7일을 살다간 매미의 삶보다도 더 슬프고 안타깝다.


“방에 들어가니 피난민들이 미처 챙기지 못한 금붙이들이 여기저기 떨어져있었어. 전우들이 그것들을 군복 포켓에 집어넣고 그랬는데…, 다 죽었지.”


전우의 죽음을 직접 목격해야 했던 아버지는 내게 딱 한 번 평양으로 진격했을 때의 모습을 말해 주었다. 아버진 살아남았고 같이 싸우던 전우들은 꽃다운 나이에 이 땅을 떠나고 말았다. 약혼자가 자신이 죽게 된다면 미칠 거라고 말을 마치던 안 소위가 지뢰를 밟아 눈앞에서 산화됐다고 전하는 아버지의 기억 끝에 무엇이 있는지는 나는 잘 모른다. 상처로 남은 건지, 위안으로 남은 건지. 또한 그 슬픔의 깊이가 얼마나 되는지도 알 수 없었다. 전쟁 중에 받은 무공훈장이 전부였던 아버지는 이따금 기억 속에 묻어두었던 전우들을 기억하며 용감했던 젊은 시절을 떠올렸을 것이다.

유품이 되어버린 장교 신분증

아버지는 혼자만의 섬에서 살아갔다. 그곳은 아버지만 닿을 수 있는 장소였다. 가끔 그 섬을 빠져나올 때가 있었는데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그 섬을 빠져나올 때의 모습뿐이었다. 현실에서 겉도는 아버지는 무능력하고 돈이 없는 아버지라고만 여겼지 아버지 마음 구석 어딘 가에 스스로를 고립시키던 섬이 있다고는 짐작하지 못했다.


가난한 아버지를 되돌아보게 된 건 보훈병원에서였다. 폐암에 걸린 아버지가 임종을 기다리던 보훈병원에는 아버지와 비슷한 또 다른 아버지들이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아버지에게도 전쟁 중에 얻은 상처가 치유되지 못한 채로 방치되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동안 나는 아버지에게 아버지로서의 책임만 요구했다. 전쟁 중에 얻은 정신적 상흔을 갖고 있었으리라곤 전혀 생각지 못했다. 그것도 모르고 꼬여버린 삶이 아버지 탓이라고만 여겼다. 어린 학도병으로 전쟁에 참전했던 아버지에게 현실은 또 다른 전쟁터였다. 권모와 술수가 필수였던 세상살이에 퇴역장교가 살아가기엔 어울리지 않았다. 흙더미로 대충 묻어버린 전우들의 죽음처럼 전쟁에 휘말려 놓쳐버린 젊음을 수습하기엔 세월은 무심하게 흘러만 갔다. 미군들이 뿌리고 간 구호물자로 간신히 주린 배를 채울 수 있던 그 시절의 원망은 스스로의 몫이었으니 하소연 할 곳도 없었다.  

  

아버지가 세상에 남긴 전 재산이다

아버지가 65세의 나이로 흙으로 돌아간 3년 후 나는 문단에 발을 내딛게 되었다. 지휘관의 품위를 잃지 않으려했던 아버지의 외로움을 진작 헤아리지 못했다는 자책은 나로 하여금 소설가가 되도록 밀어 넣었다. 등단한 지도 벌써 20년이 다 되어간다. 돌이켜보니 나도 아버지가 머물렀던 섬에서 홀로 살아가고 있었다. 세상과 단절된 채 더듬더듬 아버지가 품었던 슬픔을 끄집어내고 자신을 기다리던 약혼자에게 끝내 돌아가지 못했다던 안 소위의 마지막 순간을 종이에 적어본다.


해마다 6월이 오면 나는 대전 현충원을 찾는다.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싶어도 그 말을 들어줄 아버지는 이 세상에 안 계신다. 고분고분하지 않고 반항으로 맞섰던 철없는 딸을 용서하라는 말을 전하고 싶어도 명치끝에서만 뭉칠 뿐이다. 아버지가 어찌할 수 없던 전우의 죽음처럼 뒤늦게 밀려오는 나의 후회도 막을 길은 없다. 주먹밥으로 배를 채우며 전쟁을 치러야 했던 어린 병사의 배고픔을 한 자 한 자 써 내려가면 혹, 호국영령들에게 위로가 될까 해서 나는 소설가로 살아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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