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가슴에 더부룩하게 난 그의 은빛 털이 그리워질 때도 있었다.
“어, 언제 왔어?”
“좀 전에요.”
“그럼, 왔다고 신호를 보내야지.”
“괜찮아요. 시간 많은 걸요.”
“오늘, 그림 그리려고?”
“아니, 그냥 놀러온 거예요.”
그는 유리창 아래 놓인 흰색 부직포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내게 팔을 벌렸다. 열어놓은 창문으로 들이닥친 바람결에 덥수룩한 은발이 우수수 일어났다 가라앉았다. 난 그의 무릎 위에 걸터앉아 두 팔로 그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가끔은 가슴에 더부룩하게 난 그의 은빛 털이 그리워질 때도 있었다.
“나, 어쩜 한국에 가게 될 것 같아요.”
“그래? 잘 된 일이야? 아니면 잘못된 일이야?”
그는 언제나50프로의 확률로물었다. 그러면서도 세상엔 나쁜 것도 없고 좋은 것도 없다고 했다.
“잘 모르겠어요.”
“잘 모르겠다고?그럼 편견이있는 모양이네.편견이 없어야 망설이지 않게 되거든.”
“편견이……요?”
지금 내가 망설이는 건 편견 때문이었나?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편견이 없을 리 없지. 어떻게 미국에 살게 됐는데. 집착에 가까운 도피생활이었다. 나는 미국인 남편과 이혼하고도 조앤 플린이라는 이름을 버리지 않았다. 이름만이라도 간직하면 동화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낯선 이방문화에 섞여 살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렇게 등지고 돌아섰던 나를 한국이 초청했다. 내 명성 때문이든 뭐든 그들의 부름은 내가 한국 사람이었음을 새삼스레 떠올리게 했다.
생소했다. 받아들이기도 어려웠다. 한국방문은 이색 문양에 정신을 파는 촌티 나는 여행객처럼 가볍게 찾아갈 수 없는 나라다. 물론 남대문 시장 입구에 서있어도 쉽게 인파에 뒤섞이고 언어소통에 전혀 불편함이 없는 나라이긴 하다. 간혹 재수가 좋으면 길을 걷다가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불쑥 내 앞에 나타날지도 모른다. 그래서 망설이고 있는 중이다. 누군가는 나를 알아볼 지도 모른다는 가정이 자꾸 내 발목을 붙잡았다.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의 몸에서는 흑탄 냄새가 났다. 업소 여자들은 서양 놈의 노린내에 진절머리가 난다고 하는데 그의 몸에서는 땅에서 맡아지는 노동의 냄새가 났다.
“고마워요.”
“뭘?”
“당신을 만난 건 내게 축복이었어요.”
“그렇게 생각해준다니 고맙군.”
“전남편과 이혼을 하고 LA로 왔을 때는 정말 절망이었거든요. 그리고 당신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난 마약에 찌들어 쓰레기통이나 뒤지는 노숙자가 되었을 거예요.”
“나도 당신을 알게 되어 영광이야. 내가 어떻게 퓰리처상을 탄 사진작가하고 이렇게 숨을 같이 쉴 수가 있게 됐는지. 당신은 정말 대단한 여자야.”
“날 잊어버리지 않을 거죠?”
“물론이지. 내가 어떻게 당신같이 멋진 여자를 잊을 수가 있겠어. 세계를 놀라게 했던 것처럼 한국에 가서 또 사람들을 놀래게 만들라고.”
“글쎄요. 한국 사람들이 놀라긴 하겠죠. 내가 조앤이 아니고 미래라는 걸 알게 된다면.”
“미래? 그게 당신의 한국 이름이야? 미래? 괜찮네. 기억하기 나쁘지 않아.”
“발음하기는 쉬울지 몰라도 그 안의 시간들은 쉬운 세월은 아니에요.”
“그렇겠지. 하지만 현재, 자신의 모습만을 보라고. 지금, 얼마나 대단해! 지금 현재만 생각하면 지난 과거 따위는 오히려 아름다움이지.”
“당신은 지난 날 내가 어땠는지 잘 몰라서 그래.”
“당신의 과거? 사람마다 자신만의 과거가 있지. 감추고 싶은……. 하지만 과거가 자신에게 무거운 짐으로 남아있다면 그건 정말로 불행이야.”
'무거운 짐……?'
그럴지도 모른다. 내겐 분명 짐이었다. 벗어버리려고 해도 벗을 수 없는. 그런데도 벗을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러기 위해 나는 양미래라는 이름을 버리고 조앤 플린 속으로 숨어야했다.
“한국엔 언제 가는데?”
“근데, 아직 한국에 갈지 결정하지 못했어요.”
“왜? 비용 때문에?”
“그런 것 때문이 아니고, 모르겠어요. 뭔가 복잡해요. 두렵기도 하고요. 아니, 솔직히 자신이 없어서요.”
“그렇다면 더욱 가봐야겠네. 조앤이 어떤 기억을 갖고 있는지 모르지만 지금쯤이면 자신을 돌아볼 때도 됐어. 과거는 잊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앞으로 살아가기 위해 있는 거야. 그게 정리가 되지 않으면 앞으로의 삶은 진짜 지옥이지.”
“…….”
“그럼, 이제 이곳을 방문하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인가? 조앤이 보고 싶어서 나야말로 큰일 났는걸?”
“실은, 난……, 용서 할 수가 없어요.”
“누굴?”
“아버지, 그리고 나.”
“왜……?”
“지난 시간들 앞에 서있을 수가 없어요. 그러려면 난 그들에게 용서를 구해야 해요.”
“자신의 선택을 타인의 탓으로 돌렸었군.”
“너무 잔인하군요. 내 속을 훤히 들여다보다니.”
“사람들은 남 탓을 하지만 실상은 자기 자신에서 비롯된 일이야.”
“당신 말이 맞는지 모르죠. 지금의 내 삶을 설명하기 위해선 아버지의 무능력이 존재해야 했고 부도덕한 엄마가 필요했어요.”
“갑자기 한국이란 곳이 어떤 나라인지 궁금해지는 걸. 조앤이 자기가 태어난 나라에 이렇게 겁을 내고 있다니. 아직도 그곳은 한국전쟁 중인가?”
한국전쟁, 오랜만에 듣는 단어다. 잊고 있었다. 기억이 없는 게 아니라 떠올리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고적감이 몰려왔다. 고궁 한 귀퉁이에 말없이 자리 잡고 있는 해치의 쓸쓸한 뒷모습처럼 문득 한국전쟁의 비극이 떠올려지고 아버지가 생각났다. 전쟁이라는 끔찍한 참상은 다신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사람들은 여겼다. 아니면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게 더 솔직한 표현이겠지만. 전쟁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은 사람들의 무관심과 냉대 때문에 아버지의 삶은 평생 외진 곳에 살며 빛을 잃어갔다. 사람들은 평화를 강조하지만 정작 평화를 위해서 해야 할 일은 관심두지 못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후에 살아남은 참전용사는 쓰다가 불발된 포탄조각처럼 버려졌는지도 알지 못했다. 아버지라는 인생 줄에 걸려있던 내 인생도 마찬가지였다. 빨랫줄에 널어놓았던 흰색 블라우스가 바람에 날려 엉뚱한 곳에 처박히듯 난 이렇게 미국사람이 되어 조앤 플린이라는 전혀 다른 인물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양미래로 되돌아갈 수 있을까.
“쿽,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것 같아요?”
“일단 맞부딪혀봐. 상처 받는 게 두려워? 당신은 세계가 인정해주고 있는 사진작가 조앤 플린이라고. 이제 보니 당신이 사물을 보는 독특한 앵글은 당신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는지도 모르겠네. 나라면 주저하지 않고 한국을 가보겠어.”
해답은 1번과 2번 둘 중의 하나였다. 갈 것인가 포기할 것인가.
“갔다가 불편하면 되돌아오면 되잖아.”
그렇구나. 해답은 간단했다. 포기가 아니라 보류를 택했다. 당분간 쿽과의 헤어짐은 아쉬운 일이긴 하지만 그도 나도 이별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집착이 배제된 사랑은 무미건조할지 모르지만 그것만큼 자유스러운 관계도 없었다. 나는 쿽의 충고가 옳다고 여겼고 결정을 내리고 나니 무거웠던 마음이 사라졌다. 임 영사로부터 연락오기를 내 쪽에서 초조하게 기다렸을 정도로 홀가분해졌다.
짐을 쌌다. 버릴 것과 창고에 보관할 것들을 분류했다. 늘 옮길 것을 염두에 두었던 탓에 박스는 그리 많지 않았다.
‘이, 수첩은…….’
만화 캐릭터가 인쇄된 초등학생용 수첩이다. 삐뚤삐뚤 준비물이라고 어설프게 쓴 글씨. 낯이 익다. 내가 쓴 글씨였으니까. 아주 어렸을 때 찍었던 사진도 한 장 꽂혀있었다. 아이들은 모두 연극 분장을 하고 있었다. 모두 아라비아 상인처럼 긴 수염을 붙인 채 웃고 있었고 나는 한 손으로 인형을 껴안고 있었다. 내 옆에 있던 아이, 찬우다. 그 아이는 지금 어떻게 변했을까?
독박골.
그곳은 내 모든 기억의 시작이었으며, 과거라고 불려 지던 세월의 전부였다. 나는 그곳에서 태어났고 그리고 그곳에서 죽었다.
-다음은 장편소설 독박골 산1번지 "제5화 독박골이 어딘가요?" 편이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