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절절한 애정은 관의 경지이고 믿음의 완성이다.
‘보다’라는 동사는 인간의 원죄와 관계가 깊다. 선악과를 바라보던 하와가 먹고 싶은 욕구를 일으켰다면 죄는 보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지도 모른다.
관능적인 몸매를 감상하는 것은 그야말로 단순한 의미의 견(見)하는 것이고 먹음직스러운 요리에 군침을 흘리는 것은 시(視)하는 것이다. 자신을 살펴보는 찰(察)은 내면을 의미하지만 관(觀)보다는 한 수 아래다.
관(觀)은 근본이치를 꿰뚫어보는 단계다. 인간존재의 실상을 파악하는 불교철학이 가장 강조하는 경지다. 마음의 눈으로 보아야 하는 관의 단계에 다다르려면 수양이 따라야한다. 하지만 기독교에서는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을 최상으로 친다.
보지 않고도 본 것처럼 믿는 것, 그건 어미의 마음이다. 세상의 어머니는 종교를 초월한다. 자식이 패륜아라 할지라도 어머니는 자식에 대한 소망을 저버리지 않는다. 자식에 대한 기대를 잃지 않는 어머니의 절절한 애정은 관의 경지이고 믿음의 완성이다.
나는 불광동 부근에 있는 독박골에서 자랐다. 어느 해인가 한국방문 길에 들렀더니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살았던 우리 집은 다 헐리고 아파트 공사가 한창이었다. 재개발로 남은 동네마저 해체될 때까지 살았으니 나는 그 동네토박이로 산 셈이다.
구기터널로 넘어가는 운치 있는 지금의 가로수 길은 예전에는 개천이었고 주변은 온통 무허가 집들뿐이었다. 돌이 많아 독박골로 불리어졌던 그 동네에서는 돌멩이처럼 사람도 하잘 것이 없다. 척박한 땅. 희망이라는 낱말이 죽어버린 동네.
그런 동네에서 나의 어머니는 무엇을 보았던 것일까. 아니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기에 울부짖었던 것인가. 어머니는 틈만 나면 담요에 성경책을 둘둘 말아 집 앞에 있는 교회로 향했다. 식구들이 깰까봐 불도 못 켜고 더듬더듬 옷을 입던 어둑한 실루엣. 북한산 자락에서 훑어 내리는 독박골의 겨울바람은 어찌나 매섭고 차가웠던지.
나는 보았다. 구부정하게 딱딱한 의자에 앉아 밤새 기도를 하던 어머니의 등허리에 겹쳐지는 신의 눈물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