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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소희 Nov 10. 2017

“그래도 나는 한국인이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수풀처럼 짙어가는 게 향수병이다

사람, 사람, 사람. 한국 사람들. 지하철 문이 열리자 우르르 낯익은 사람들이 쏟아져 나온다. 고향 아저씨 같기도 하고 옆집 아줌마 같은 내 핏줄들이다.


 내 귀는 고속 음향 기기처럼 사방에서 들려오는 정겨운 소리를 남김없이 빨아들였다. 핸드폰으로 나누는 자박자박한 대화를 엿듣고 느닷없이 팔걸이에 엉덩이를 들이밀었다고 시비를 거는 다툼에 귀를 쫑긋 세웠다. 설 지낼 음식을 해놨다고 몇 번씩 아들에게 전화를 거는 어느 어머니의 대화는 오래전에 잊었던 언어였다.


전동차 이 칸 저 칸에서 밤 깎는 가위를 파는 아저씨에게 삼천 원을 건네고 중국산이 아닌 가 살펴보았다. 내가 산 가위를 한 번 보자고 말을 건네는 할머니의 요청에 난 선뜻 물건을 보여주며 말을 주고받았다.

 앞좌석에 앉은 아이엄마는 자기 아이에게 영어단어를 익히게 하느라 묻고 또 묻는다. 영어학원이름이 새겨진 가방이 아이의 팔에 걸려있었다. 난 슬며시 얼굴을 돌렸다.


미국에 살면서도 아직도 영어에 서툰 내 게으름이 창피해서다. 오히려 나는 가물가물해지는 한국어를 잊지 않기 위해 영어사전대신 국어사전을 뒤적이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난 한글로 소설을 쓰느라 영어공부는 포기한지 오래다. 미국에 살아도 영어로 유창하게 대화하는 건 꿈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몇 년 만에 한국에 나온 나를 아무도 '재외동포'라고 열외로 치지 않았다. 아무도 ‘국적이 어디냐’ 묻지 않고 ‘네가 사는 한국으로 도루 들어가라’ 다그치는 사람도 없다.


 이중국적을 허용하자는 내용이 국회에서 논의되고 그 범위를 두고 갑론을박 따질 무렵 난 한국을 방문했다. 투표권을 부여한다면 다른 국민의 의무도 부여해야 한다는 강경한 논리가 서운했다. 일부에게만 그 권한을 부여하자는 쟁론은 건너편에 앉아 열심히 영어 단어를 익히는데 열중인 아이와 엄마를 바라보는 것처럼 씁쓸하다.


 한국을 떠났으니 미국 정치인들에게 관심을 가지라는 논리야 틀린 말은 아니다. 물론 그렇게 해야겠지만 내 피붙이가 살고 있는 한국에 대한 그리움을 어떻게 무 자르듯 잘라버릴 수가 있겠는가. 오히려 살면 살수록, 나이가 들면 들수록 수풀처럼 짙어가는 게 향수병이다.

 요즘은 세계 구석구석에 한국 식당이 없는 곳이 없다. 삐뚤삐뚤 한국식당이라고 적힌 간판을 보면 얼마나 반가운지. 그건 경험해본 사람만이 안다. 소시지와 스크램블 에그가 곁들여진 아침식사는 잘해야 한두 끼다. 매콤한 김치가 제공되는 한국식당이 세계 도처에 있다는 건 나같이 비위가 약한 사람에겐 다행스런 일이다.


 타국에 나가있는 사람들은 또 다른 국가의 자원이다. 이중국적의 논리를 갖고 내 나라 남의 나라 편을 가를 게 아니라 이민을 갈 수 밖에 없는 선택에 위로를 베풀어야 한다. 한국의 정치인들은 각국에 흩어져 사는 3백만의 표를 얻을 계산이 먼저겠지만 우리가 원하는 건 우리를 잊지 않고 챙겨주는 모국의 관심이다.

 설사 국적이 바뀐들 검은 머리카락이 노랗게 변색될 리 없고 굳어진 혓바닥에서 영어가 좔좔 쏟아질 리 없다. 오바마가 멋지게 대통령 취임식을 치렀다 해도 그저 타국의 대통령처럼 한 다리 건너다. 한국을 떠난 것 사실이지만 모국을 잊지 못하는 속정만은 변함이 없는데. 때로는 홀대받는 것 같아 서운함도 감출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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