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권소희 Nov 03. 2017

힘없는 애국심

타국에 살고 있다는 건 내 삶에 두 개의 삽화를 그려 넣는 일이다 

작고하신 시아버지는 나를 ‘운동권’이라고 놀리셨다. 오랫동안 언론계에 몸담고 계셨던 시아버지는 며느리에게서 최루탄에 맞섰던 대학생들의 저항을 엿보았던 모양이다. 그렇다고 나는 시위에 가담한 적도 없고 또 그럴 용기도 없었다. 어쩌면 민주화를 부르짖기 위해 거리로 뛰쳐나가는 여건마저도 부럽기만 했던 평범한 시민에 불과했다. 6월 항쟁이 일어나기 두 달 전 한국을 떠나야했던 87년은 내 삶과는 전혀 연관이 없는 해이기도 했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나는 유목민처럼 한국이 아닌 타국에 살고 있다.


  조국을 떠나 타국에 살고 있다는 건 내 삶에 두 개의 삽화를 그려 넣는 일이다. 하나는 조국을 등졌다는 죄책감이고 또 하나는 미국이란 사회에서 겉도는 열등의식이다.


 그건 최초로 영어 통역관이 되었던 윤치호의 고민과 같다면 비약적인 표현일까. 근대 문물을 배우려면 영어를 해야 한다는 김옥균의 권유로 화란 영사관 서기관으로부터 5개월간 영어를 배운 그가 자신의 내면을 60년간 영어로 기록했다는 것은 언어를 습득하려는 위한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일기는 의식의 고백이기 때문이다.

1896년 6월 26일자 윤치호 영문일기 원본. 사진=윤경남



 “1시 30분 경 거리에서 군중의 함성이 들렸다. 창 너머 거리에 학생과 사람들로 꽉 메어졌고 ‘만세’를 외치면서 종각 네거리로 달려가고 있었다. 소년들이 모자와 목도리를 흔들었다. 순진한 청년들이 애국의 이름 아래 자진해서 위험을 감수하는 이 안타까운 광경에 눈물이 솟구쳤다. 우리는 혹 말썽이 있을까 싶어 문을 모두 닫았다.”


3.1운동에 대한 그의 일기는 서글프다.


 “독립이 우리에게 주어진다 한들 우리는 이를 잘 이용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일본은 1894년에 우리에게 독립을 주지 않았던가. 우리는 그때 무엇을 했던가. 약소민족이 강대민족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면 약속민족은 자기보호를 위해 반드시 강대민족의 호의를 얻어야 할 것이라.”고 소회를 기록했다. 국권상실의 아픔보다는 조선민족의 자력갱생이 불가능하고 믿었던 식민논리가 드러나 있는 대목이다.

말년의 윤치호와 만세를 외치며 행진하는 시위군중

독립협회 간부, YMCA 창립자로서 선각자였던 그의 생애는 사람들의 인생만큼이나 굴곡졌다. 그가 만약 지금의 시대에 살고 있다면 영어로 일기를 쓸 정도의 정열로 대한민국을 위해 또 다른 업적을 남겼을 지도 모른다.

 

 식민사관에 포섭되었던 윤치호를 비난하기에 앞서 미국에 사는 나 자신은 어떤가. 그 질문은 나를 불편하게 만든다. 말하자면 근대화의 열망이 너무 컸기에 친일의 행보를 택해야 했던 윤치호의 식민사관보다 못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어를 배워야 한다는 하위 이데올로기 구조에 떠밀려 강대국의 호의에 젖어,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살면서 안위하고 있는 내 자신을 어찌 부인할 수 있겠는가. 낮은 존재감으로 인해 정신적인 자괴감을 안고 있으면서도 미국에 살고 있는 것이 무슨 특권이나 얻은 것처럼 으스대고 있는 못나빠진 게 내 모습이기도 하다. 전쟁도발을 암시하는 북한의 움직임에 ‘미국에 살고 있으니 괜찮아’ 속으로 위로하고 있는 이 비겁함까지도.


 행여 저 태평양 너머에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까 전전긍긍해지는 요즘이다. 내 피붙이가 살고 있는 저 땅을 바라보며 발만 동동 구르는 이 힘없는 애국심이 부끄럽다.

매거진의 이전글 다울정과 한국인의 저력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