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oheek Sep 17. 2021

달걀 속 기억들


2021.03.24


3월이면 비교적 한산한 시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오전이나 저녁쯤에 작업에 들어갔고, 오후는 나와 라오지 그리고 디아오쒜와 시간을 보내며 놀기 바빴다. 미대에는 위에 사진과 같은 사물함이 정말 많았는데, 새겨진 날짜를 본다면 십 년은 족히 넘었던 사물함들이다. 어떤 계기였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나와 라오지는 사물함을 열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그날 오후는 미대 5층에 위치한 모든 사물함들을 열어보기 시작했다. 몇 개는 자물쇠가 채워져 열지 못했고, 몇 개는 너무 낡고 고장이 나서 열리지 않았다. 열어보았던 사물함 속에는 우리보다 훨씬 전에 졸업한 사람들의 물건들과 작품들을 발견할 수 있었으며, 재미있는 물건들도 수두룩했다. 나와 라오지는 이 사물함에 관한 글을 쓰면 좋을 거 같다는 생각에 언제 한번 날을 잡고 사진을 찍자고 계획했다.


3월 24일 오후, 작업실에 누워서 책을 읽고 있었던 날, 라오지가 다급하게 나를 불러 사진기를 챙기라고 했다. 지금 아저씨들이 사물함을 치우고 있다고, 없어지기 전에 사진을 찍어야 한다고. 우리 둘은 부리나케 달려 나가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그렇게 아저씨들과 우리 둘의 경쟁이 시작되었다. 누가 더 빨리 사진을 찍고, 누가 더 빨리 치우는가.  







이 글의 제목을 달걀 속 기억들이라 했던 것은, 라오지와 함께 사물함을 열어보고 그 안의 물건들을 보고 있을 때, 라오지가 문득했던 말 때문이다. 이 사물함이 갑자기 달걀처럼 느껴진다고. 학교를 다녔던 사람들의 물건, 그들의 생각과 꿈을 고스란히 품어 둔 사물함은 후에 누군가의 발견을 통해 기억됨으로써 태어날 수도, 혹은 기억되지 못해 무정란과 같이 부화되지 못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사물함은 한 공간에 움직이지 않은 채, 흘러가는 시간과 그 흐름 속에서 왔다가는 사람들의 변화를 거치며 미대 복도를 꿋꿋이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사물함들이 치워지는 것을 보니 갑자기 오묘한 감정이 들었다. 어쩌면 너무 감성적일 수도 있겠지만, 보관돼있던 기억들이 완전히 없어질 거만 같은 느낌을 받아서일까.





사진을 찍는 내가 신기했던지 아저씨는 계속 뒤돌아보며 나를 보셨다. 멀어져 가는 사물함을 보며 어디론가 이동되는 옛 시간의 흔적이 멀리 사라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사물함 속의 물건들은 그 물건의 주인들 기억 속에 남아 있을까 싶다.








사물함 속 수많은 물건을 보면서, 꽤 재미있는 물건들이 많았다. 특히 내 기억 속에 특별히 남아 있는 것은 플라스틱으로 된 상자였는데, 그 안에는 CD 음반이 차곡히 정리되어 있었고, 크기가 다른 소라 껍데기 5~6개가 담겨있었다. 소라 껍데기를 보는 순간 나는 얼른 두 개의 소라 껍데기를 양쪽 귀에다 댔다. 라오지도 같이 두 개의 소라 껍데기를 귀에다 가져댔다. 그렇게 우리 둘은 조그마한 플라스틱 상자 앞에 쪼그려 앉아 소라 껍데기를 귀에 가져다 댄 채, 바닷소리를 들어보고, 서로 말을 걸며 윙윙거리는 진동을 느껴보고, 어릴 적 놀이였던 종이컵 전화같이 서로 멀리 떨어진 채 말을 걸어보며 그 자그마한 소라 껍데기만으로도 꽤 긴 시간 동안 놀았다. 소라 껍데기를 귀에 가져다 대면 소리의 진동이 더 잘 느껴질뿐더러, 어렸을 때 기억도 새록새록 나기 시작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걸로 기억한다.








우리는 사물함이 다 치워질 때까지 복도에 남아서 지켜보았다. 사물함이 치워지고 남겨진 자리에는 사물함 주인의 이름표가 남아있었다.


영원히 기억 속에서 사라지지 않기를.

작가의 이전글 커피 3인방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