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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워하지만 미워할 수 없는

나폴리 4부작을 읽고, L과 나의 이야기

by 누런콩

‘나폴리’라는 단어는 얼핏 들어본 적 있다. 이탈리아 어느 지방에 있는 도시라고 했다. 이탈리아에는 가본 적도 관심도 없었지만, 피자가 맛있을 것 같은 그 도시 이름만은 기억에 남았다. 그런 나폴리를 배경으로 한 대하소설을 읽은 건 순전히 우연에서였다. 시인 박연준의 『인생은 이상하게 흐른다』 마지막 부분에는 그녀가 읽었던 책 소개가 포함되어 있다. 나는 그 산문집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그녀가 언급한 책을 모조리 사들였다. 나폴리 4부작도 그중 하나였다. 총 4권으로 된 이 소설은 ‘다 읽을 수 있을까?’ 겁이 날 정도의 두께였다. 매도 먼저 맞자는 심정으로 1권 『나의 눈부신 친구』를 집어 들었다. 그러곤 단숨에 읽어냈다. 적어도 한 달은 걸릴 줄 알았는데 채 2주가 되지 않아 마지막 장을 덮었다. 다음 내용이 궁금해 하루 왼 종일 책을 붙잡고 있던 날도 많았다. 그만큼 흡입력 있기도 했지만 어쩐지 책을 읽는 내내 한 사람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소설은 릴라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며 시작된다. 소설가가 된 주인공 엘레나는 릴라가 그렇게 사라지고 그녀와 6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있었던 이야기를 써 내려가고자 마음먹는다. 기록은 릴라의 행동에 대한 보복이었다.


릴라는 어릴 때부터 비범했다. 학교에서 배우지도 않은 글자를 읽어내는가 하면 마을의 권력자에게 찾아가 다짜고짜 잃어버린 자신의 인형을 돌려달라고 하기도 한다. 거침없이 남자들과 싸우고 욕을 하는 릴라에 비해 엘레나는 모범생 그 자체다. 제 할 말을 참고 티 내지 않는다. 엘레나는 자신과는 다른 릴라에게 열등감과 우월감을 느끼기를 반복하며 언제나 그녀를 의식한다. 대학까지 나온 자신에 반해 릴라의 배움은 초등학교에서 멈추지만, 엘레나는 언제나 릴라가 자신보다 좋은 글을 쓸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엘레나는 릴라에게서 벗어나고 싶어 하면서도 그녀에게 속하고 싶어 한다. 릴라가 햄 공장에서 노역하는 모습을 보곤 자신이 이룩한 모든 것을 보잘것없게 느끼기도 한다.


내게도 릴라 같은 친구가 있다. L과 나는 대학 시절 둘도 없는 단짝이었다. L은 아주 똑똑하고 부지런했다. 한 시간 반이 넘게 지하철을 타야 했음에도 수업 시간이면 맨 앞자리에 앉아 손을 들곤 했다. L은 ‘아니’라고 말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언젠가 친구들끼리 신에 관한 논쟁을 한 적이 있다. 앉아있는 사람 중에는 독실한 크리스천도 있었다. 모두가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L은 거리낌 없이 사후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L은 무슨 일이든 따져 물어 손해를 보는 일이 없었다. 나는 그런 L을 보며 ‘살면서 억울하게 당하는 일은 없을 거야.’ 생각하곤 했다.


L이 호주로 유학을 떠나고 우리 사이는 멀어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각자의 삶에 충실했다. 영어 공부를 위해 떠난 L은 되도록 한국어를 쓰지 않으려 했다고 한다. 나는 L에게 부담이 되지 않으려, 먼저 연락하지 않는 L에게 지기 싫어서, L이 괘씸해서 그녀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다 보니 어느새 우리는 겨우 가끔 서로의 안부를 묻는 정도의 사이가 되었다. L이 돌아왔을 때 나는 이미 학교를 졸업한 상태였다. 나는 취업 준비를 해야 했고 L은 복학할 준비를 해야 했다. 우리가 다시 서로의 삶의 일부분을 차지하게 된 건 같은 회사에 입사하고 나서다.


회사는 대학과 달랐다. 어쩔 수 없이 경쟁해야 하는 상황 속에 우리는 이미 고유한 개인이 되어 있었다. L은 여전히 당차고 야무졌다. 그런데 나는 그런 L을 보며 ‘어쩜 저렇게 제 할 말만 다 할까.’하고 아니꼬워했다. 똑똑한 그녀를 질투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무슨 일이 있으면 L을 찾았다. 릴라에게서 벗어나려고 하면서도 속하고 싶어 하는 엘레나처럼 말이다. 나는 친구를 지독하게 미워하는 스스로와 마주하기 싫어 ‘L에게 신경 쓰지 말아야지’ 되뇌면서도 끊임없이 그녀를 의식하고 있었다.


며칠 전 이슬아 작가의 ‘세바시’ 강연 영상을 보았다. 글을 쓴다는 것은 어쩌면 시선을 ‘나’에게서 ‘타인’에게로 옮겨가는 일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부지런히 나를 바라보듯이 타인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려면 가족을, 친구를, 남을 나를 사랑하듯이 사랑해야 한다. 나는 그 순간마저도 L을 떠올렸다. L이 보고 싶었다.


엘레나의 마음을 애써 포장하지 않아 나폴리 4부작이 좋았다. 릴라에 대한 마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서술해주어서 공감하며 읽었다. 친구에게 느끼는 묘한 감정은 쉽게 털어놓을 수 없는 그 무엇이다. 사이가 틀어질 수도 있고, 부정적인 감정을 표현함으로써 내가 후진 사람이 된 것만 같은 패배감을 맛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설에서 내 모습을 발견하고 나니 어쩐지 속이 후련해졌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고 안도했다.


이쯤 되니 L이 언젠가 릴라처럼 사라져 버리진 않을까 걱정이 된다. L에게 더 다정한 사람이 되어야겠다. L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으면 좋겠다. 나의 눈부신 친구, 그 상태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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