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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로 몸부림치기

by 누런콩

작가가 되고 싶었다. 나는 유년 시절을 외국에서 보냈다. 엄마는 위험하다며 낯선 땅에서 어린애 혼자 바깥에 내보낼 순 없다고 했다. 자연히 나는 방구석에 틀어박혔다. 방학이 되면 특히나 할 게 없었다. 부모님은 한국에도 잘 내보내 주지 않았다. 대신에 일 년에 한 번씩 십만 원어치의 책을 주문해주었다. 그때는 책값이 그다지 비싸지 않았다. 민음사에서 나오는 세계문학전집은 말 그대로 헐값이었다. 내가 장바구니에 담은 건 대부분이 연애소설이었다. 그 시절 나는 제인 오스틴이나 샬럿 브론테 같은 작가들의 책을 쌓아두고 읽었다. 조달받은 책을 해치우고는 친구 집에서 읽을거리를 빌려왔다. ‘다르시 같은 남자를 만나야지.’ 생각하면서도 몇백 년을 살아남은 소설들에 놀라움을 느끼곤 했다. <비커밍 제인>이라는 영화는 내 마음에 불을 지폈다. 영화 속에서 제인 오스틴은 사랑하는 남자를 잃고 남은 생애 동안 글을 쓴다. 자신의 삶과는 달리 소설 속 주인공들의 사랑은 언제나 이루어지게 만든다. 아릿한 이야기였다. 나는 그 영화를 실화라고 믿어버렸다. 삶의 한을 글로 풀어내는 일에 대한 막연한 로망을 가졌다. 아무래도 답은 작가가 되는 것밖에 없었다.


사실 나는 글쓰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좋아하고 말고를 평가할 수조차 없었다. 글을 제대로 써본 적이 없으니 말이다. 그 흔한 백일장 한 번 나가본 적 없었다. 기껏해야 학교에서 내주는 작문 숙제를 해내는 게 전부였다. 글을 쓰기 시작한 건 대학 입시를 준비하면서부터다. 내가 다니던 학원에서는 매주 시험을 보고 성적별로 반을 나누었다. 이 세상에 영어나 수학을 잘하는 아이들은 너무나도 많았다. 제일 높은 반에 있던 나는 점점 아래 반으로 내려갔다. 대학을 가려면 다른 수를 찾아내야 했다. 마침 학원에 논술 반이 개설됐다. 내겐 돌파구였다. 논술은 국어 선생님의 개별 지도로 이루어졌다. 짬이 나면 찾아가 지도를 받는 식이었다. 나를 가르쳐 준 선생님은 한 씨였나 보다. ‘국한쌤’이라고 불렸다. 처음 글을 써갔을 때 선생님은 소질이 있다며 나를 칭찬해 주었다. 나는 신이 나서 선생님이 내준 숙제에 정성을 들였다. 주제를 내주면 온갖 칼럼은 다 뒤졌다. 남의 의견을 짜깁기해 열심히 흉내를 내자 선생님은 숙제를 점점 늘리셨다. 나는 선생님께 칭찬받는 게 좋아서 일주일에 두 편씩 글을 썼다. 쉬는 시간마다 쓰는 걸로는 모자라서 지하철 안에서도 썼다. 그때는 내게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줄 알았다. 대학 합격 통지서가 그걸 사실이라고 증명해주는 것만 같았다.


글을 써서 먹고사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어떤 글을 쓸 건지는 막상 정하지도 못했다. 막연히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내가 다니던 대학에는 마땅한 연구실이 없었다. 그래도 나는 연구하고 논문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게 내가 쓸 수 있는 유일한 글일 것 같았다. 취업 생각은 뒷전이었다. 수업 시간에 들은 자잘한 칭찬들이 그런 나를 지탱해주었다. 대학교 1학년 때 ‘사고와 표현’이라는 교양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 교수님은 예문을 나눠 주시고 학생들에게 글을 써오라고 하셨다. 나는 일주일간 곰곰이 그 예문을 들여다보았다. 문득 아이디어가 떠올라 ‘효도폰을 쓰게 해 주오.’라는 글을 적어 제출했다. 다른 학생들이 써낸 글은 신랄한 비판을 받았지만 내 글만은 칭찬을 받았다. 그때 나는 쓰고자 하는 사람이 아닌 써야만 하는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쓰는 사람이 되지 못했다. 대학원에 다니고 있을 때 갑작스럽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당장에 집에 돈을 벌어 올 사람이 필요했다. 나는 학업을 그만두고 취업을 준비했다. 조금도 속상하지 않았다. 그때는 내 꿈이 좌절되었다고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어디라도 적당한 돈벌이가 되는 곳이라면 가고 싶었다. 빵집과 카페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며 자격증을 땄다. 내 전공은 취업하기에 유리했다. 그 특수성 때문에 그나마 경쟁률이 덜했기 때문이다. 대학을 다니는 내내 제대로 된 학문이 아니라며 학과를 저주했지만, 취업을 준비하는 동안만큼은 전공에 감사할 수밖에 없었다. 운이 좋게도 준비한 지 일 년 만에 취업했다. ‘아, 내가 회사원이 되었구나.’ 나는 감격스러우면서도 서글퍼졌다.


회사를 오니 배울 게 많았다. 교육이며 술자리며 정신없이 불려 다녔다. 한동안 글을 써야겠다는 마음은 잊어버리고 살았다. 글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소망을 간직하는 것만으로도 사치를 부리는 것 같았다. 근무에 어느 정도 적응을 하고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생겼을 때 나는 서울에 있는 어느 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님께 메일을 보냈다. 배움이 간절해 그런데 도강을 해도 되냐는 얼토당토않은 내용이었다. 턱도 없었다. 그러나 친절하게도 교수님은 교외에도 강의가 있으니 찾아가 보라는 답변을 해주셨다. 나는 주로 도서관에서 열리는 문학 강의를 들으러 다녔다. 인터넷 강의도 들었다. 언제 어떻게 사설 글쓰기 강의가 있다는 것을 알아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꽤 큰 비용에 망설이다 수업을 등록한 게 삼 년 전 일이었다.


신촌에서 처음 들은 수업은 일대일 수업이었다. 제대로 배워서 글쓰기로 부수입을 얻는 게 목적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회사를 그만두고 작가로 살아보자는 마음이었다. 첫 수업을 시작하기 전 글을 한 편 써오라는 요청을 받았다. 주제는 따로 정해주지 않았다. 그런 글쓰기는 처음이었다. 나는 어깨에 힘을 잔뜩 주고 노트북을 켰다. 회사생활의 어려움을 A4 용지로 세 바닥이 넘게 적어냈다. 무언가를 설명하지도, 주장하지도 않았다. 에피소드가 들어있는 것도 아니었다. 돌이켜보면 그건 일종의 푸념일 뿐이었다. 선생님을 처음 대면하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자신감에 넘쳐 있었다. ‘내겐 천부적인 재능이 있으니까.’ 그런데 선생님이 프린트해 온 종이에는 빨간색이 마구 처져있었다. 수업 시간 동안 지적만 당했다. 이를테면 ‘이런 문장은 꾸민 문장이잖아요, 이렇게 쓸 필요 없어요.’ 같은 말들이었다. 난생처음 그렇게 꼬집히고 나니 속이 얼얼했다. 선생님이 하는 말은 대부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나는 쓰기만 하면 다 통할 줄 알았다. 알고 보니 그건 내 환상이었다. 글을 써서 생활할 수준에 도달하기까지는 부지런한 단련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웬만한 노력으로는 어림도 없어 보였다. 나는 비로소 이 생태계에 눈을 떴다.


한동안은 신촌 근처엔 발도 들이지 않았다. 나는 그저 평범한 사람일 뿐이라는 현실을 마주하기가 싫었다. 쓰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마음은 차라리 외면하고만 싶었다. 어릴 적부터 간직해온 오랜 꿈은 내팽개쳐 두었다. 작가가 되는 길은 너무나 고단하고 아득해 보였다. ‘그만한 에너지가 내 안에 있을까?’ 의구심마저 들었다. 사실 글은 써도 그만 안 써도 그만이다. 내겐 먹고 재워주는 직장이 있다. 충분하진 않아도 아쉬운 데 없는 생활이다. 내 안의 무언가가 풀리지 않고 있다는 답답함만 참고 견디면 된다. 그런데 그 작은 응어리가 나를 종종 서글프게 만든다. 노력하지 않는 건 차라리 노력하는 것보다 힘든 일이다. 그래서 나는 그냥 몸부림치기로 했다. 나의 꿈은 여전히 작가가 되는 것이라고 인정하기로 했다.


제인 오스틴이나 샬럿 브론테 같은 작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그래도 나는 언젠가 두고두고 기억될 글을 쓰고 싶다. 가끔은 그저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데 내 모든 시간을 할애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일하는 시간이 아깝게 느껴질 때도 있다. 그럴 때면 나는 애써 그 생각을 떨쳐내고 하고 있던 일에 집중하려고 한다. 회사원과 작가 지망생을 오가는 내 생활에 때때로 조급함을 느낀다. ‘둘 다 망쳐버리면 어쩌지.’라는 불안감에 휩싸일 때도 있다. 그래도 나는 해보려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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