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미용실에 가려고 했다. 머리카락을 짧게 잘라내려 말이다. 그런데 가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머리카락 길이가 어중간하면 운동하는 데 오히려 방해가 될 것 같았다. 요즘엔 약속을 잡을 때도 운동할 시간이 확보되는지 미리 확인한다. 약속 때문에 도무지 운동하러 갈 짬이 나지 않겠다 싶으면 선약이 있다고 적당히 둘러대고 만다. 운동은 내 의사결정의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나는 크로스핏터다. 핏터라고 하기엔 민망할 정도로 운동을 잘하지 못한다. 그래도 크로스핏을 시작한 지 어느덧 6개월이 다 되었으니 핏터라고 하고 싶다. 크로스핏은 crosstraining과 fitness의 합성어다. 원판을 끼운 바벨을 들어 올리는 역도, 철봉에 매달려 수행하는 체조, 유산소 동작이 마구 섞여 있다. 크로스핏을 하는 곳은 ‘박스’라고 부른다. 박스마다 매일매일 하는 운동이 다르다. WOD는 Workout Of the Day의 약어로 그날 하는 운동을 말한다. 예를 들어 오늘은 박스에서 데드리프트라는 동작을 100개 한다고 치면 데드리프트 100개가 오늘의 WOD가 되는 것이다. 수업을 듣는 사람은 똑같은 WOD를 수행하고 칠판에 그 기록을 적는다. 우리 박스의 경우 코치진이 매일 밤 네이버 카페에 내일의 WOD를 올려준다.
크로스핏을 처음 접한 건 회사 선배의 추천 덕분이었다. 지난 7월 무더위가 한창이던 어느 날 나는 다리 건너 위치한 ‘리폼드 크로스핏’이라는 박스에 1일 체험을 신청하였다. 첫날의 WOD는 행잉 레그레이즈와 클린을 연달아 수행하는 것이었다. 행잉 레그레이즈는 철봉에 매달려 다리를 들어 올리는 동작이고 클린은 바벨을 쇄골이 있는 곳까지 들어 올리는 동작이다. 몇 개를 했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다만 기억나는 건 첫날 운동을 하고 받은 충격이다. 이런 운동을 일반인이 한다는 게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나는 그곳에 있던 사람들보다 훨씬 약한 강도로 운동했다. 15분 할 걸 10분만 했는데도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심장은 너무 빨리 뛰어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나 않을까 겁이 날 정도였다. 더 충격적이었던 건 남자고 여자고 할 것 없이 웃통을 벗고 있었다는 것이다. ‘동네 몸짱은 여기 다 모여 있었구나.’ 싶었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오목교를 건넜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가족들에게 “이건 미쳤어. 미친 운동이야.”라고 토해냈다. 그날로 끝일 줄 알았다. 그런데 다음날 나는 이유 모를 이끌림에 다시 오목교를 건넜다. 금방 싫증이 날까 봐 한 달 권을 끊었다. 수업은 새벽 시간에도 있었다. 도무지 시간이 나지 않으면 그 수업엘 갔다. 한 달이 지나고 나는 다시 6개월 권을 끊었다.
운동을 시작하고 나는 변했다. 가장 큰 변화는 몸무게에 대한 집착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입사하고 불규칙한 생활과 대중없이 먹는 식습관에 20킬로그램이 훅 쪄버렸다. 식이요법으로 거의 10킬로그램을 감량하는 동안 매일같이 몸무게를 쟀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체중계에 올라갔다 내려왔다. 체중이 늘어있으면 스트레스를 받았다. 운동을 시작한 것도 다이어트 목적이었다. 운동에 재미를 붙이자 신기하게도 몸무게에 집착하던 습관이 사라졌다. 살이 쪄도 그냥 그런가 보다 받아들이게 되었다. 체중이 줄어들면 물론 좋겠지만 아니어도 상관없다. 나는 이미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치로 운동하고 있다. 이래도 안 빠지면 어쩔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인지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1킬로그램 빠지는 것보다 조금 더 오래 철봉에 매달리고 조금 더 무겁게 바벨을 들어 올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활기를 되찾기도 했다. 그럴 때가 있다. 뭘 해도 재미가 없고 하루하루 시간 가는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질 때. 다람쥐 쳇바퀴 굴러가듯 굴러가는 삶이 지루하게 느껴질 때 말이다. 그런데 크로스핏을 접하고 나선 매일 대개 즐겁다. 어제 안 되던 동작이 오늘 되면 뿌듯하다. 며칠 전엔 무릎을 대지 않고 하는 푸시업에 성공했다. 마침 다음날 WOD에 푸시업이 있었다. 제주도에 가는 날이었지만 나는 그날의 WOD를 놓치고 싶지 않아 새벽부터 박스로 향했다. 요즘엔 매일 밤 내일의 WOD를 보는 재미로 산다. 회사 사람들은 내게 얼굴색이 좋아졌다고들 한다. 땀을 흘려 그런 것일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인생이 즐거워져서가 아닌가 싶다.
유튜브로 ‘크로스핏’을 하도 검색하다 보니 알고리즘이 핏터들 영상으로 도배되었다. 나보다 운동을 훨씬 잘하는 사람들을 보며 나도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다짐한다. 운동을 시작하기 전에는 크로스핏에 대한 막연한 편견이 있었다. 부상이 많은 운동이라고 생각하며 지레 겁을 먹었다. 막상 해보고 나니 여느 운동이나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든다. 욕심을 부릴수록 다칠 위험이 커지는 건 똑같다. 크로스핏이라고 해서 특별하게 위험하진 않다는 생각이다.
나는 체력이 좋은 편이 아니다. 오히려 약한 편이다. WOD를 완주하는 것도 버거워한다. 그래서인지 포기하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그날의 WOD를 해내면 새삼 뿌듯하다. 그날은 아무것도 안 해도 무언가를 이룬 기분이 든다. 크로스핏, 해보니 참 좋다. 하루하루 나는 더 강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