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장례식은 나흘이었다. 엄마는 그 4일을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았다. 고모들은 엄마 곁에서 생수병을 들고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며 뭐라도 좀 삼켜주기를 애원했다. 납득가지 않는 죽음이었다.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그렇게 됐으니 말이다. 조문객들은 아빠가 어쩌다 그렇게 되었는지 물어왔지만 우리는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아니, 벙긋할 수 없었다. 사인을 밝히면 아빠에게 흠집을 내는 것만 같았다. 떠나간 아빠에게 그런 오점을 남길 순 없었다. 생각지도 못한 방법이었다. 아빠의 죽음으로 내 죽음의 선택지도 하나가 추가되었다. 나는 그 후로 나도 언젠가 아빠와 같은 방법으로 세상을 떠나지 않을까 생각하곤 했다.
오랫동안 아빠에 대해 쓰고 싶었다. 아빠는 유쾌한 사람이었다. 내가 온갖 정신질환으로 시달리던 시절에는 아빠가 퇴근하기만을 기다렸다. 아빠의 긍정적인 에너지가 내 숨통을 트여주는 것만 같았다. 아빠는 핸드폰 진동 소리에 맞추어 이상한 춤을 추었다. 노래를 흥얼거리며 셔츠를 다렸다. 아랫집에서 올라오진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로 큰 소리로 말하고 말소리보다 더 크게 웃었다. 아빠와의 기억을 끄집어내면 아빠가 더 오래 내 곁에 머물러주진 않을까. 아빠 얼굴도, 목소리도 자꾸만 잊어버리는 나를 책망하면서 나는 아빠에 대해 쓰고 또 썼다.
우리는 서로의 방식으로 아빠를 앓았다. 엄마는 아빠의 물건을 정리하지 않았다. 계절이 바뀌면 입을 사람도 없는 아빠의 옷을 깨끗하게 빨아 널었다. 다림질한 그 옷을 차곡차곡 옷장에 넣었다. 아빠 속옷이며 양말은 손도 못 대게 했다. 엄마는 입버릇처럼 “내가 빨리 늙어버렸으면 좋겠어.”라고 했다. 나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었지만 왜냐고 물어보지 않았다. 나보다 세 살 어린 남동생은 어느 날 술에 잔뜩 취해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며 울었다. 초등학생이었던 막내는 학교에서 심리치료를 받았다. 담임선생님은 아이가 지나치게 가족들의 건강을 염려한다고 했다. 아빠가 큰 사람이었던 만큼 그 빈자리도 컸다.
25년을 아빠와 함께 살았다. 아빠와 같이 산 시간만큼 아빠를 기억하고 싶었다. 그보다 더 긴 시간은 신께서 허락하지 않을 테니 앞으로 올 하루를 아빠와 살았던 하루만큼 차감하는 것이다. 그럼 50살까지, 딱 아빠가 이 세상에 머무른 시간만큼 나도 머물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빨리 이별이 찾아왔다. 아직 10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아빠와의 기억이 흐릿해져 간다. 떠오르는 순간도 몇 없다. 엄마가 옛 기억을 곱씹으면 그제야 기억 속의 아빠가 떠오른다. 아빠가 했던 말이나 행동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나는 종종 아빠를 잊고 산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 나는 이상하게 그 말이 듣기 싫었다. 아빠가 없는데 어떻게 살라는 말이야. 나는 되받아치고 싶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산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졌다. 포기하지만 않으면 꾸역꾸역 가는 게 세월이었다. 아빠가 여전히 그립고 보고 싶지만, 아빠가 없는 삶에도 적응해 버렸다. 이제는 아빠 물건을 정리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고 느끼면서도 차마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고 눌러 담는다. 이런 나를 아빠는 무정하다고 할까. 내가 괘씸해서 자꾸만 내 기억을 지우려고 하는 걸까.
아빠 없는 하루를 또 살았다. 나는 그게 퍽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