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운동을 했더니 온몸이 쑤신다. 출근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오늘을 무사히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 크로스핏을 다시 시작했다. 운동에도 관성이란 게 있는지 한번 시작하면 계속하게 된다. 쉬는 것도 마찬가지로 한 번 쉬다 보면 계속 쉬게 된다. 나는 두 달이 넘게 운동을 하지 않았다. 먹고 누웠다가 다시 먹었다. 몸무게 앞자리가 바뀌었다. 근 몇 년 동안 본 최고치였다. 그러면서도 다시 체육관을 찾는 건 쉽지 않았다. 이 핑계 저 핑계로 발걸음을 미뤘다. 수많은 다짐과 용기 끝에 체육관에 다다랐다. 그동안 왜 안 왔냐는 질문에 대답하기가 머쓱할 것 같아서 체육관을 옮겼다. 새로운 곳은 원래 가던 곳보다 작고 사람도 적었지만 좋았다. 코치님이 여자여서 더 그랬나 보다. 100파운드가 넘는 무게로 데드리프트를 하던 나는 겨우 45파운드에 나가떨어졌지만, 오랜만의 운동으로 다시 피가 돌았다. ‘그래, 이 느낌이었지.’ 기지개를 켤 때, 계단을 오르내릴 때 어깨와 팔과 뒷다리가 뻐근했지만 좋았다. 나는 기억해 냈다, 내가 근육통을 좋아했던 것을.
체중은 나를 괴롭힌다. ‘식욕’과의 지긋지긋한 줄다리기에서 나는 번번이 쓰러진다. 앞으로 딸려 나간다. 그만큼 식욕은 힘이 세다.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만 같다. 나는 과거의 영광을 잊지 못하고 지금을 한탄한다. 어릴 땐 이러지 않았는데, 나도 날씬한 적이 있었는데. 덩치가 크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않고 길거리를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지하철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에 수그러들지 않던 시절이었다. 그것도 한참 전이다. 굶어야겠다는 생각 없이 살아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내가 연애를 못하는 것도, 남자들이 나를 욕망하지 않는 것도 다 내가 뚱뚱해서인 것만 같다. 언젠가 친구에게 이런 고민을 털어놨는데 그녀는 “아니야, 근데 맞아.”라며 내 뼈를 때렸다. 남자를 만나려면 살부터 빼라고 했다. 인생의 대부분을 남자 없이 잘 살았지만, 나머지 인생도 남자 없이 살긴 싫다. 솔직히 말하자면 충분히 먹고사는 삶은 만족스럽다. 아니, 행복하기까지 하다. 남자만 아니라면 나는 기꺼이 몸매를 포기할 것이다. 적당히 운동하면서 마음껏 먹는 행복을 누릴 것이다. 하지만 이성과의 연애, 그놈의 ‘남자’를 포기할 순 없다.
우리는 욕망하는 것을 욕망하지 말기를 욕망한다. 그렇게 강요당한다. 여자는 ‘조신’해야 하니까. 속에 있는 것들을 꺼내 비치면 누군가는 불편해한다. 그게 나는 아니라고는 못 하겠다. 멀리사 브로더의 『오늘 너무 슬픔』이라는 책을 읽었는데 적나라한 문장에 나는 솔직히 조금 불편했다. 섹스에 대한 판타지와 강박관념 같은 걸 예쁘게 다듬지 않고 드러내서 놀랍고 부러우면서도 거부감이 들었다. 솔직해도 이렇게까지 솔직할 필요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우리 사회가 안전하게 욕망을 드러내지 못하는 사회라면, 그 사회에 속한 내가 점점 그 사회와 동기화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좀 슬프다. 여성을 대상화하지 말라면서도 나는 욕망의 ‘대상’이 되기를 원한다. 이런 모순적인 나라서 짜증 난다. 화가 난다. 그렇다고 나를 미워하고 싶진 않다. 먹고 싶은 걸 참고 몸을 움직이면서 나는 ‘이게 다 내 건강을 위한 거야.’라고 합리화한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그 저변에 예쁘게 보이고 싶은 욕망이 깔려있다는 것을. 그것도 아주 짙게 말이다.
크로스핏을 하면서 좋은 건, 생각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운동해서 귀가 비행기에 탄 것처럼 멍멍했던 경험이 있는가. 크로스핏이 끝나면 몸 안의 기압과 밖의 기압이 맞지 않는 기분이다. 거친 숨소리가 자꾸만 귀에 걸려서 불편해진다. 도무지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할 것 같은 상태로 바벨을 잡는다. 해내지 못할 것 같은 한 개를 해낸다. 크로스핏은 짜릿하다. 크로스핏을 하고 있으면 내가 날씬하고 싶고, 예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저 눈앞에 보이는 덤벨과 케틀벨을 한 번 더 들어 올리고 싶은 생각뿐이다. 한 번이라도 더 바벨을 잡아서 이 WOD를 끝내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멋진 몸매를 위해서지만 운동 자체가 좋은 것 같기도 하다. 어쨌거나 나는 열심히 하려 한다. 다시 시작한 크로스핏, 끝까지 가보자고!